스포츠의 상업화 그리고 현재와 미래
1) 스포츠의 상업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스포츠를 통한 체제 간 대립 구도는 그 직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이미 1970년대 핑퐁 외 교를 통해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이후 확산되고 있던 데탕트의 분위기와 함께 1964년부터 소련을 통치해 오던 브레즈네프가 1982년 사망한 후 안드로포프 와 그 뒤를 이은 고르바초프가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냉전체제가 급 속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냉전체제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그 뒤를 이은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완전히 해체되고 만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스포츠에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스포츠의 상 업화이다. 스포츠의 상업화란 스포츠가 개인의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수단이 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의 수단이 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사업으로서 돈벌이 의 수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상업화는 프로 스포츠를 중심으로 이 미 20세기 초반부터 존재했던 현상이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냉전체제의 약 화를 배경으로 아마추어 스포츠에까지 상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스포츠의 상업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올림픽의 상업화를 꼽을 수 있다.
올림픽의 상업화 역시 1980년대에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이미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경기장 내에 광고판을 설치한 적이 있으며, 그 후의 올림픽에 서도 올림픽의 상징과 엠블럼의 사용권을 기업에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올렸기때문이다. 또한 1950년대 이후 텔레비전의 보급이 확산되고 위성통신의 발전 으로 올림픽 경기의 중계가 용이해지면서 텔레비전 중계권료가 10C의 주수입원 으로 자리 잡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버리 브런디지가 1952년부터 1972년까 지 TOC의 위원장으로 있을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올림픽의 상업화에 대한 거 부감이 강했던 편이었으나, 1980년에 IOC의 재정적 독립을 강조했던 후안 사 마란치가 위원장이 되면서 이런 거부감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올림픽의 상업화가 극적으로 진전된 계기는 1984년의 LA 올림픽이었다.
LA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 기업이 모든 경기를 조직하고 관 리한 올림픽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피터 위버로스(Peler Veberroth)가 있었다. 원래 여행업에 종사하던 사업가였던 그는 조직위원장을 맡은 후 제품 종류별로 한 회사에 독점 후원권을 주는 방식으로 경쟁을 유도 하여 그 당시 2억 2,500만 달러라는 전례 없는 이익을 냈다. 이후 1985년부터 IOC는 올림픽 파트너 프로그램(The Olympic Partners Program)을 마련하여 본격 적으로 후원 유치에 나섰다.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던 올림픽에서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프로 선수의 출전을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포츠의 상업화에는 텔레비전의 확산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스포츠 중계가 텔레비전의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면서 스 포츠 기구에 주어지는 중계권료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중 일부는 선수들 에 대한 보상으로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 선수의 몸값이 천정부지 로 치솟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70년대에 도입된 자유계약선수 제도 덕분이지 만 그 배경에는 급속하게 상승한 텔레비전의 중계권료가 있다. 이제 단지 개인 의 명예를 위해 스포츠에 참여하고 시상식에서 수여되는 월계관에 만족을 느 끼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경기에서의 승리는 엄청난 돈과 직결된다. 아마추어 선수들조차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물 사용을 불사하게 된 것은 스포츠의 상업화가 가져온 어두운 현실이다.
- 핑퐁 외교(ping-pong diplomacy)
핑퐁 외교는 1971년 4월 6일에 열린 제31회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 전한 탁구선수를 비롯한 미국 선수단 15명과 기자 4명이 같은 해 4월 10일부터 1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총리와 면담을 가진 데 이어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순방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20년 이상 막혔던 교류 의 징검다리를 놓은 사건을 말한다. 이 일을 계기로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2년 2월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미국과 중국 양국이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하기에 이른 다.끝으로 이 두 차례의 핑퐁 외교는 결국 1979년에 미국이 중화민국(대만)과 단교 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전격적으로 수교하는 결실을 맺는다.
- 데탕트(detente)
데탕트란 원래 '완화' 또는 '휴식'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정치적으로는 1970년 대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긴장완화를 의미한다. 미 • 소 양국이 이른바 냉전 상태를 지속해 오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평화공존 정책으로 점차 세계 전체에 냉전 상황이 완화된 것을 데탕트라고 한다.처음 데탕트라는 말이 쓰인 것은 1970년대 초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 등 공산 국가들을 방문하고 냉전 종식을 위한 합의문을 이끌어 낸 데서 비롯했다. 데탕트 무 드는 동서 냉전이 차차 줄어들고 양쪽 진영이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는 뜻에서 미 국 언론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 올림픽 파트너(The Olympic Partner: TOP)
TOP는 올림픽 대회의 공식 후원업체를 가리킨다. 1985년 국제올림픽위원회 (10C)가 대회 운영을 위한 안정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을 스폰서로 유치하는 올림픽 파트너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IOC는 4년 단위로 올림픽 파트너를 선정하며, 선정된 업체는 차기 올림픽 파트너 협상의 우선권을 갖는다.
TOP는 각 분야별(정보기술, 컴퓨터, 무선통신, 음료, 신용카드, 생활용품 등)로 1개 업 체만 선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므로 전 세계 10개 안팎의 글로벌 기업만 될 수 있 다. 올림픽 파트너는 하계 • 동계 올림픽의 후원을 책임지면서 10C와 올림픽조직 위원회, 올림픽 팀을 지원하는 대신 4년 동안 올림픽과 관련된 마케팅 독점권을 갖는다.
2) 여성 스포츠의 발전
20세기 중반 이후의 스포츠에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여성들의 스포츠 진 출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펼쳐진 여성운동 이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냉전체제의 약화와 함께 커다란 정치적 대립이 사라지면서 그전까지 가려져 있던 대립이 전면에 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영 향을 미쳤다.
물론 여성의 스포츠계 진출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근대 스포 츠의 형성기부터 여성의 스포츠 참여는 이루어졌으며, 1900년의 제2회 올림픽 에서는 여성 종목도 열렸다. 하지만 이때의 여성 스포츠는 그 종목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여성의 참여에도 이런저런 제한이 가해지기 일쑤였다. 남성들의 집 요한 방해로 결국 여성 축구가 1920년대에 중지된 것이 이를 보여 주는 하나 의 사례이다.
1960년대 이후 여성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에게 봉쇄되어 있던 스포츠의 영 역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앞서 예를 들었던 보스턴 마라톤의 캐스린 스위 처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미국에서는 1972년에 타이틀 Ix이 제정되어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남녀 스포츠에 대한 동 등한 지원을 규정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여성 보디빌딩이 시작되었고, 1984 년에는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종목이 되었으며, 1991년부터는 여성 축구의 월 드컵이 열리기도 했다.
한편 1980년대에는 프로 스포츠에서의 남녀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 적으로 일어났다. 주요 테니스 대회에서의 남녀 간 상금 차이에 대한 항의가 그것이다. 그 이전까지 주요 테니스 대회나 골프 대회에서의 여자부 경기는 그 저 남자부 경기의 여흥 정도로만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경기에 승리한 남성 선수들이 엄청난 상금을 받을 때 여성 선수들은 최소한의 경비 정도에 불과한 상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테니스의 킹과 나브라틸로바 같은 선수들은 이런 차별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했으며, 그 결과 아직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하지만 남녀 선수 간의 상금 격차가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여성 선수의 상금이 늘어나면서 여성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스포츠에 대한 동등한 참여를 추진해 오던 여성의 스포츠 참여는 더욱 늘어날 유인을 얻게 되 었다. 많은 남성 선수와 마찬가지로 여성 선수에게도 이제 스포츠는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유망한 직업이 되었고, 이는 더 많은 여성이 스포츠에 참여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여성의 스포츠 참여율은 남성에 비해 현 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그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3) 생활체육의 발전
20세기 중반 스포츠에서의 또 다른 큰 변화는 참여 스포츠에 대한 강조이 다. 군사훈련으로서 스포츠가 정립된 이래 스포츠는 항상 소수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활동이었다. 근대 스포츠가 만들어진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 히 프로 스포츠의 발전은 많은 사람을 단순한 스포츠의 관객으로 만드는 데 더욱 기여했다.
1970년대 중반 생활 스포츠의 발전은 이런 과거의 경향을 뒤바꾼 혁명적 현 상이었다. 생활 스포츠의 발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첫째, 모든 시민의 동등한 권리를 강조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하면서 동 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온 역사적 경향이 있다. 인권 개념의 확대가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애초 신체의 자유와 같은 초 보적인 권리에 머물던 인권 개념이 그것을 보장해 줄 결정에 참여할 권리로서 정치권으로 확산되었고 나아가 모든 시민의 행복추구권과 연결되는 사회권으 로까지 발달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포츠의 향유권 역시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의 하나로 정립되었다.
둘째, 데탕트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스포츠와 관련한 국가 자원의 투자 가 소수의 엘리트 선수에게 국한되지 않고 다수의 시민에게도 분배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생활체육의 확산으로 방향을 틀었던 일본의 사례가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셋째, 비만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다는 점 도 빼놓을 수 없다. 비만인구의 증가는 한편으로는 식생활의 변화로 영양이 과 잉공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구조의 변화로 좌식 생활을 하는 인구가 늘 어나게 되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이처럼 비만인구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효과적 해결책으로 생활체육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이 발전한 것이다.
넷째,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계급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적 • 경 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실 19세기 중반 이후 프로 스포츠가 발전한 배경 에는 노동계급이 스포츠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이 기여 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경제의 발전은 노동계급의 시간적 • 경제적 여유를 증가시킴으로써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을 제공했다.
다섯째, 스포츠 산업의 발전도 있다. 여러 상품의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거대 기업의 성장은 소수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사치품 생산이 아니라 상대적으 로 저렴하지만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대량생산 상품의 발전에 달려 있 다. 처음 육상선수를 위한 신발에서 시작했다가 대중 소비자를 겨냥한 상품을 생산하여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로 성장한 나이키의 사례가 이런 변화를 보여 준다. 스포츠 산업은 비만인구의 증가라는 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수요를 적절 히 이용했지만 역으로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상품을 소비할 대중 소비자의 창출에도 앞장섰다. 애플의 아이폰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소비자 스스로 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욕구를 충족시키며 스마트폰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 내었듯이, 스포츠 산업도 스포츠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스포츠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본 세계 스포츠의 역사는 스포츠의 향유 기반이 확대 되고 스포츠에서의 차별이 점차 완화되어 온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그 과정이 늘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집단으로의 스포츠 확대 는 기존에 그 스포츠를 즐기던 집단으로부터 항상 저항을 받았고, 때로는 스포 츠를 특정한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는 정치적 욕망이 스포츠의 확산을 방해하 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동시에 스포츠의 역사는 스포츠의 규격화와 상업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 리고 이는 스포츠의 확산이 지니는 의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스포 츠의 규격화와 함께 각 지역이나 집단의 고유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많은 스포 츠가 사라짐으로써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에 스스로를 적응시 키도록 강요되기도 했으며, 스포츠의 상업화와 함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스포 츠 향유의 기회가 다시 제한받는 결과가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로봇과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발달은 '노동의 종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 대를 전망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더 이상 노동이 필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신체활동으로서 스포츠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종말이 다수의 사람에게 소득의 종말이 될 결과를 낳을 수 있듯이 스포츠의 상업화 역시 다수의 사람에게 신체활동의 종말이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해 줄 수 있도록 할 기본소 득에 대한 논의가 점차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듯이 모든 사람 이 최소한의 운동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기본 활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포츠의 역사는 그 과정 역시 그냥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