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시대의 학교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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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대의 학교체육

모두가 교육을 열망하는 사회

2021년 현재 우리 사회 고등학교 3학년의 대학진학률은 70%를 넘나 든다.
학령기 청소년 10명 중 7명 이상이 대학에 진화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고학력 사회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왜 이처럼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대학진학의 일차적 의미는 이른바 출세 또는 안정된 삶의 확 보와 관련이 있다. 혹은 안정된 삶의 확보를 위한 경쟁에서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대학의 여러 학과 중 적성과 무관하게 의과대학이 가장 높은 성적을 올린 수험생들로 채워지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거의 모든 수험생이 미래에 안정된 삶을 확보해 줄 것으로 믿어지는 소수의 대학과 학과의 입학 정원 속에 포함되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며, 그 결과 초중고등학교의 교육은 모두 대학진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처럼 입학의 목적이 안정된 직 업과 삶이다 보니 대학교육도 취업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교육을 이른바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에 과거제가 도입된 이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가 지배했던 전근 대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교육받을 기회 나아가 관직에 오를 기회가 제한된 어 있었고, 관직 진출 외의 다른 출세의 수단은 거의 막혀 있다 보니 상대 적은 로 출세의 수단으로 교육의 의미가 덜 부각되었던 편이다. 또는 교육을 출세의 수단으로 상정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전체 인구에 비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완성된 인간을 지향하는 유교교육의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 유명한 유학자들이 과거를 위한 교육을 경계했던 것은 이런 배경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신분제가 폐지되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와 관직 진출의 기회가 개방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더구나 민주주의 체제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신분질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영국이나 일본 등과 달리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기존의 신분질서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 린 우리 사회에서는 신분 또는 지위 상승의 열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 다. 이제 과거의 출신 신분이 무엇이든 교육만 잘 받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하에서 2등 국민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와 달리 광복 이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누구에 대한 차 별도 허용되지 않는 평등한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이런 열망은 더욱 강 해지게 된다.

교육이 완성된 개인을 기르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면 단지 출세를 지향하며 교육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교육에서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다. 그 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직접적으로는 대학입시 경쟁의 완화를 위해, 궁극 적은 로는 교육의 본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주기적으로 교육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아직도 입시경쟁의 치열함이 조금도 완화되지 않은 것에서 드러나듯이 이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출산율의 저하와 같은 요인 덕분에 교육현장에 전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대학입시를 위한 주류 과목에서 벗어나 있는 체육에서 그런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났다.

주류 과목에서 벗어나 있던 체육은 한편으로는 대학입시에 매몰되어 있는 학 생들에게 주목받을 전술이 필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주류 과목에서 벗 어나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개혁은 전통적 틀에 젖어 있는 교사와 새로운 틀을 모색하는 교사가 한데 섞여 있는 교육현장의 현실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그런 한계 속에서도 개인의 완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체육, 더 많은 사람에게 신체활동의 기회를 부여할 체육을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대구 해성학교 체조 수업시간 모습 (현 효성의 전신)

교육개혁을 향한 여정

우리 사회에서 교육개혁에 대한 시도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개혁을 시도한 주체가 누구였는가 또는 개혁을 추동했던 사회의 요구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개혁의 지향과 내용에도 다소의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테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교육을 제공하려고 했던 평준화 정책과 특정 분야에 소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교육을 제공하려는 특수 목적 교육과 같이 상반된 개혁이 시도된 데는 그 개혁이 시도되었던 시기의 정권이 지닌 상이한 지향과 시대적 상황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혁의 주체나 상황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서 교육개혁과 관련해 가장 주요한 대상이 되었고 국민들의 관심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은 우리 사 회 교육을 틀 지우는 데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대학입시제도의 개혁이었 다.

1980년까지의 대입제도 개혁은 한편으로는 대학입시의 공정성 확보와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베이비붐 세대의 많은 수험생과 대학의 좁은 문을 감안한 재수생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었다. 1969년부터 시행된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1980년에 발표되어 1981년 신입생부터 적용된 대학졸업정원제가 대표적이다. 대학입학 예비고 사는 부분적으로 국가의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대학의 자율에 맡겨져 있던 대학입시제도의 불공정성에 대한 비판에 대 응하여 국가고시를 통해 최소한의 자격조건을 거르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합격한 학생들은 이후 대학별로 실시하는 본고사를 치르 게 되는데, 국가가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예비고사와 대학 자율의 본고사가 결 합되니 이원적 제도는 1980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대학졸업정원제는 대학 정 원의 130%를 신입생으로 선발한 후 대학 재학 중의 성적에 따라 졸업 시 정원을 초과하는 30%의 학생은 탈락시키고 나머지 학생들만 졸업시키는 제도이다.

졸업정원제는 대학별 본고사 폐지 및 사교육 금지 조치와 함께 시행되었는데, 그 명분으로는 일단 입학만 하면 공부를 등한시하는 대학생들에게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여 대학교육을 정상화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재운 동의 중심지였던 대학의 관심을 사회로부터 돌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대학입 학 정원을 늘림으로써 사교육으로의 쏠림을 완화하고 재수생의 수를 줄여 보 자는 의도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그런데 대학 설립 자유화를 표방하며 1996년 시행된 대학설립준칙주의에 의해 대학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재수생 문제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대학을 설립하려면 단계별로 조건을 충족하여 인가를 받아야 했지만 대학설립준칙주의는 최소 설립요건을 갖추면 곧바로 대 학 설립이 가능하도록 만든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해 수많은 신설대학이 설립되어 원하기만 한다면 거의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그 리고 그 결과는 이른바 일류대학으로의 쏠림 현상이었다. 누구나 대학은 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수가 제한되어 있는 일류대학과 인기학과의 문은 여전히 소 수에게만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개혁의 주요 이슈는 한 번의 시험으로 대학입학이 결정되며, 주로 암기력 측정에 치우친 입시제도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입수학능력시험이나 논술시험, 수시전형과 입학사정관제 등이 다 그런 맥락에서 도입된 제도이다.

대입수학능력시험 은 학력고사의 점수로 수험생들을 줄 세우는 현실이 불합리하다는 인식에서 실 제 수험생이 취득한 점수를 절대화하지 않고 일정 범위에 속한 점수를 하나의 등급으로 정해 등급 내부의 차이를 없앤 것이며, 수시전형은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불합리를 교정하고 다양한 재능이 입시에 반영될 수 있도록 여러 번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고, 논술시험은 암기력 위주의 시험방식이 지닌 문제점을 교정하여 사고력을 측정하도록 한 것이다. 또 2008년부터 시행된 입 학사정관제는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와 같이 성적만으로 학생을 뽑던 것을 지 양하고 수험생들의 고등학교 시절 활동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대학의 지향에 맞는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공교육을 정상화하여 수험생과 학부모의 부담이 덜어졌다거나 수험생의 잠재능력과 대학의 지향이 결합되어 적성에 맞는 학생이 선발되는 것과 같은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제도가 단지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되기도 하면서 대학의 학생선발 제도는 누구 도 전모를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다양화되었지만 정작 사교육을 줄 이고 수험생과 학부모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 다. 여전히 공교육은 황폐화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사교육은 번창하 고 있으며, 수험생과 학부모는 복잡한 입시제도하에서 합격을 보장할 최선의 조합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여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의도했던 성과를 얻지 는 못했지만 이 모든 개혁은 교육현장에 충격을 주어 변신을 시도하도록 만들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학입학시험제도개선안 1990)에 의거하여 1994학년도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시행한 대학입학시험. 고등학교 내신성적 및 대학별 고사성적과 함께 대학입학자 격검사의 중요한 평가자료로 활용된다. 시험의 출제와 채점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 담당하고, 시행 및 관리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각 시 • 도교육청이 함께 하도 록 되어 있다. 이 시험은 학교교육을 통해 학습된 능력을 시험한다는 점에서 지능검 사나 적성검사와는 다르며, 학력고사(기존의 예비고사, 대학의 본고사)가 각 교과별로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통합교과적인 출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특정 교과별 시험 과도 다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과거 대학입시제도가 고등학교 3년 간의 학업성취만을 측 정하고 실제 대학교육에 필요한 학습능력과 사고력 등 학업적성을 평가하지 못하 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암기 위주의 시험을 지양하여 고도의 정신능력을 측정함으 로써 중등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한국교육과 정평가원에서 밝힌 구체적인 목적은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 측정으로 선발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는 출제로 고등학교 학교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하며, 개별 교과의 특성을 바탕으로 신뢰도와 타 당도를 갖춘 시험으로서 공정성과 객관성 높은 대입 전형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16번이나 바뀐 대입제도

교육개혁은 실패했지만

 

교육개혁은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런 개혁의 충격과 연관되어 또는 그와 무관하게 우리 사회 교육현장의 변화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 는 교육의 틀이 되는 우리 사회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첫째, 가장 큰 틀에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점차 성숙되어 갔다. 이는 교 육 현장에서의 강압적 분위기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까지 우리 사회의 학교를 병영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었던 교련 수업이 폐지되었고 체벌도 금지되었다. 교장과 교감, 주임교사에서 평교사에 이르는 통제체 제가 상당 부분 완화되었고, 심지어 교권의 침해에 대한 논란이 제기될 만큼 교사, 학생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경제적인 면에서 정보사회가 진전되면서 새로운 인력에 대한 수요가 제기되었다. 1990년대부터 강조되기 시작한 이른바 창의력 교육이 이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그런 요구는 상당히 허구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창의력 교육 이 강조되던 1990년대의 우리 사회는 아직 창의력을 갖춘 인재에 대한 수요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며, 교육현장에서도 창의력 교육을 실시할 현실적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교육의 강 조점이 달라진 것은 교육현장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바꾸는 데는 기여했다.

셋째, 우리 사회의 저출산과 연관된 학령인구의 감소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아이를 많이 낳는 이른바 베이비붐이 진행되면서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가족계획, 다시 말해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1980년대 초반 이후 출산 율이 인구 대체선인 2.1명 이하로 떨어지고, 2002년에는 출산율이 1.18명으로 까지 떨어져 인구 감소에 대한 위기의식이 제기될 만큼 출산율이 낮아졌다. 이 처럼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이때 태어난 아이들이 학교에 진학할 시기가 되자 학령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반에는 출산율은 떨어졌더라도 부모의 수가 워낙 많아 상대적으로 학령인구의 감소가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베이비붐 이후의 세대가 자녀들을 출산하기 시작하고 그때까지도 저출산 이 지속되면서 학령인구의 감소는 눈에 두드러질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출산 율이 떨어진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위기였으나 교육현장의 상황에서 보 면 학령인구가 감소되면서 과거의 과밀학급이 해소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긍정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학교에 다녔던 1960~1970년대 만 하더라도 대도시를 기준으로 초등학교의 한 반 학생수가 90여 명에 이르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중학교는 70여 명, 고등학교는 65명 정도가 표준적인 한 반의 학생 수였다. 하지만 출산율이 저하되고 학령인구가 감소하면서 한 반의 학생 수도 급격하게 줄어들어 지금은 25명 내외의 학생이 한 반을 구성하 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학생으로 반을 꾸려 가고 있기도 하다. 이런 변화는 개별 학생에 대한 맞춤형 지도를 좀 더 용이하게 만 들었으며, 대규모 학생 기준의 교육방식에 대한 변화를 요구했다.

넷째, 앞의 요인들과 연관되어 학교에 대한 사회 인식도 바뀌었다. 1990년 대 초반까지 이어진 독재정권기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학교는 학생들의 교육과 관련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민주화와 함께 과거의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나고 고학력의 학부모가 증가했으며, 이들이 저출산의 결과인 소수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게 되면서 학교가 지닌 권위주의적 틀에 대한 반발이 제기되었다. 1980년대 말 이후 학교에서의 자녀들을 위한 불공정한 청탁을 가리키는 이른바 '촌지'가 지 속적으로 사회문제화되고 교사의 자질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일었던 것은 이런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제도의 개혁과 연결되어 또는 그와 무관하게 현장의 변 화를 강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런 변화는 다양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 학부모들과 상이한 세대가 뒤섞여 있는 교사 집단의 복합성 때문에 일조일 석에 이루어지기보다는 점진적인 변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꾸준히 지속되었고, 2000년대 말 이후가 되면 많은 학교에서 눈에 보일 만큼 변 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학교교육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교육개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와 함께 학교교육, 그중에서도 고등학교의 교육은 '교실봉괴라는 표현이 사용될 만큼 황폐해졌다. 이는 우리 사회 초중등교육을 틀 지우던 대입 경쟁이 전혀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1983년에 경기과학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확대된 과학고와 외국어 고, 예술고 등의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 2010년부터 시작된 자율형 사립고 등학교(자사고) 등이 모두 원래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입시명문고로 바뀌면서 대학입시를 위한 경쟁은 다시 초중학교 수준으로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과 정에서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물론 특목고와 자사고를 다니는 학 생들조차 학교 바깥에서의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 결과 학교는 대학입시의 세 개 주된 평가기준으로서 수능과 내신, 논술 중 내신성적 만을 평가하는 기관으로 바뀌고,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몰입도 이 내신성적의 획득과 연관되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원칙으로만 보면 수능과 논술에 대해서도 학교 내에서 준비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 두 영역에 대한 교육은 학교 바깥의 사교육이 담당해야 할 영역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공교육의 붕괴를 말 그대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대중매체에서 공교육의 붕괴를 언급할 때는 대학입시를 위한 경쟁과정에서 가장 첨예한 경쟁이 일 여나는 최상위층 수험생들을 염두에 둔 사례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일류대 신입생의 특정 지역 쏠림 현상이 자주 지적되었듯이 최상위층 수험생들은 지역적으로 그리고 그와 연관되어 계층적으로 상위의 집단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고, 이들은 이 좁은 집단 내에서의 경쟁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교육비를 투자하기도 한 집단이었다. 반면, 계층 체계에서 위계가 내려갈수록 사교육비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에게 공교육은 비록 불만은 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영 역이었다. 결국 대학입시 경쟁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최상위층과 그에 속하기를 열망하던 수험생들에게 공교육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영역으로 인식되었고, 이것이 이른바 교실붕괴를 가져온 일차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반대편에는 대학진학률이 최고에 도달했을 때도 여전히 대학을 가지 않았던 최소 20%의 학생들이 있는데, 이들은 입시교육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교교육에 아무런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그에 따라 하교교육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소외되었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공교육 또는 교실의 붕괴라 는 현상은 교육의 목적이 전인적 인간의 양성으로부터 입시 준비로 바뀌면서 그에 적응하지 못했던, 또는 적응을 거부했던 공교육의 부적응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처럼 학교교육이 외면받는 가운데에서 그나마 학교교육이 인정을 받았던 영역은 학생부종합전형을 포함한 내신 점수의 평가 부분이었다. 반면, 이처럼 대학입시에서 학교가 담당할 영역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역으로 학교의 자율성을 높일 기반이 되어 주기도 했다. 다수의 학생에게 내신이 여전히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입시를 위한 주요 역할은 사교육에 맡겨져 있다 보니 학교는 오히려 본래적인 의미의 교육을 시험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회의 활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그 결과 대부분의 학교는 무기력증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소수의 학교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학생부종합전형
학생부종합전형은 대학입시 수시전형의 일종으로 줄여서 학종이라고도 한다. 자 기소개서, 학교생활기록부, 교사 추천서를 바탕으로 교수 및 입학사정관들이 생활 기록부를 15분에서 20분 정성평가하여 1차 합격자를 선발한다. 그 이후 대부분 대 학에서 면접을 본다.
내신 성적과 같은 정량평가뿐만 아니라 수상, 자격증, 진로, 창의적 체험활동, 교 과학습, 독서, 행동발달 등(정성평가) 학교생활기록부의 거의 모든 요소를 종합 적은 로 평가하여 학생들을 선발하는 전형이다. 대학에서 학종으로 학생 선발 시 고교등 급제가 암묵적으로 시행되고 있어 자사고, 특목고, 비평준화 명문고 학생의 경우 상 대적으로 낮은 내신으로 합격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2020학년도 학생부종합전형 지역별 선별인원 및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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