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의 교육과 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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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을 배우는 이유

만 8세가 되면 우리나라의 모든 어린이는 학교에 입학한다. 그 때부터 그들 은 고등학교까지의 12년 또는 대학을 넘어 박사과정까지 다닌다면 20여 년 이 상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9년 현재 우리 사회의 평 균수명 83.3세를 기준으로 할 때,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생의 1/7에서 1/4에 가 까운 시간 동안 학교교육을 받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 학교 등 학교의 등급에 따라 과목의 구성에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대 학입학을 위한 필수과목으로 꼽는 국어와 영어, 수학이 있고, 여러 사회 과목 과 과학 과목이 있으며, 음악과 미술 등의 예능 과목도 있다. 대학에 가면 자신 이 선택한 전공학과의 여러 교과를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여러 과목 중 하 나로 체육이 있다. 제1장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 바 있지만 이 여러 과목의 교육에는 모두 그 나름의 근거와 목적이 있다. 이를테면 국어의 교육은 말과 글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을 활발하게 만들고, 수학의 교육은 논리적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주 된 목적이다. 그럼 체육 과목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물계를 구성하는 여러 종 가운데 인간은 동물에 속한다. 동물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종을 가리킨다.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생존 을 도모하는 식물과 달리 동물은 움직임을 통해 먹이를 구하고 생명활동을 영 위한다. 이 움직임에는 단순히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초식동물의 움직 임도 있고, 먹이를 사냥하는 육식동물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 서 로를 물고 할퀴며 놀이를 하는 것처럼 어미 또는 형제자매들과 이루어지는 육 식동물의 놀이도 궁극적으로는 사냥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대개 1년 남짓의 짧은 훈련기간을 마치면 독자적인 존재로 독립하는 다른동물과 달리 인간의 훈련기간은 매우 긴 편이다. 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상대 적으로 작게 태어나 성숙이 매우 천천히 이루어지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특성 과 연관이 있는 것이지만 사회적 • 문화적 존재인 인간의 속성과도 일정한 연 결을 지니고 있다. 즉, 비록 훈련은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본능에 의해 지도 되는 다른 동물의 움직임과 달리 인간은 본능에 따르는 움직임에 덧붙여 그가 속한 사회와 문화가 필요로 하는 움직임 역시 훈련받아야 하고, 이는 본능에 따르는 움직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의 훈련을 요구한다. 당장 우리 사회 음식 문화의 핵심 부분 중 하나인 젓가락질의 훈련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기울여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특정 사회와 문화가 요구하는 움직임이 얼마나 긴 시간의 훈련을 요구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한 사회에 독특한 움직임에 덧붙여 그 사회 내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특정 집단에 요구되는 움직임도 있다. 이를테면 신분에 따 라 또는 성에 따라 요구되는 움직임이 서로 다른 것이다. 즉, 양반과 상민, 남 성과 여성에게 요구되는 움직임에는 차이가 있고 이를 훈련하는 데 역시 상당 한 기간이 소요된다. 여기에 흔히 우리가 매너나 에티켓이라고 부르는 사회관 계에서의 일반적인 예법까지 덧붙인다면 그 기간은 더욱 늘어나고 난도는 더 욱 높아질 것이다.
체육은 이런 움직임의 훈련과 연관되어 있는 과목이다. 물론 제2장에서 살 펴보았듯이 체육을 통해 훈련받는 움직임은 원시적인 사냥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중에서도 남성들이 했던 움직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민속놀이가 존재했다는 것은 각 나라에서 발전한 사냥 기술이 서로 달랐고 그 때문에 주로 훈련되는 움직임의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각 나라가 처한 환경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로 초식동물을 상대해야 하는 환경 에 있었던 사람들과 육식동물과의 조우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 했던 환경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체의 움직임에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체육교과의 구성이 나라마다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이는 세계화와 함께 현대사회가 그만큼 동질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어와 역사 등 각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일부 교과목을 제외한다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의 여러 과목을 포괄하는 다른 교과목들에서도 각 나라 사이의 차이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대체로 개화기 이후 다소의 굴곡을 거치면서 이런 표준화된 틀이 도입되었다. 그렇다면 이 틀이 도입되기 전 우리 사회 체육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까?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알아보자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이 두 시대를 가르는 근대(modernity)라는 개념에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에서 칼리네스쿠(M. Calinesou)가 말 하듯이 근대라는 말 속에는 어원에 걸맞게 단순히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도 담 겨 있는 반면, 그 이전의 시대와 구별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기 때 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근대사회는 르네상스와 시민혁명 및 산업혁명에 의해 중세 봉건사회가 해체된 후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 된 사회를 가리킨다. 즉, 서구 사회에서 근대는 르네상스 이후 중세의 신중심 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재발견되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 으면서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체제의 정립, 경제적으로 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 자본주의 체제의 확립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런 근대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도래에 버금가는 큰 변화를 가져온 시대로 얘기된다.
하지만 비록 혁명을 거쳤다고는 해도 근대의 성립이 그 이전의 시대와 일정한 연속성을 지니며 이루어졌던 서구 사회와 달리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의 근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즉, 제3세계 국가의 근대란 서 구세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체제가 이식된 이후의 시대이며, 이런 의미에서 근대화란 바로 서구화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서구 사회에서 근대란 멀게는 14~15세기에서 싹터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된 시기를 이르는 반 면, 제3세계에서의 근대란 그 서구와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서구의 틀로, 그리 고 대개는 강요에 의해 스스로의 사회를 바꾸어 가게 된 시기를 일컫는다. 이 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의 근대는 아무리 길게 보더라도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자주적 권리가 훼손 되기 시작한 이후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근대의 시기가 좀 더 앞당겨질 수는 있다. 이를테면 비록 서구와의 접촉과 영향은 거의 없었지만 자생적으로 서구의 근대와 유사 한 변화를 이루어 나갔던 시기를 근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사 회에서 근대의 시작은 상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유학 중심의 과거 체제를 비판 하며 민본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했던 18세기의 실학사상에까지 거슬러 올 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산업에서의 변화와는 별도로 실학의 개 혁사상은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근대의 기점으로 보기에는 다소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한다.

우리 체육의 시작은 언제일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정확히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매 우 오래전부터 한반도는 인간의 거주공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직접 조상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공식적인 역사가 이 데올로기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달리 우리 민족이 여러 민족의 혼혈에 의해 형 성된 민족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구석기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사건에 의해 모두 사멸해 현재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전자를 남기지 않 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화적 색채가 강하긴 해도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뿌리가 시작되는 것 은 단군시대 이후부터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현재 우리가 체육이라고 부르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체 움직임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군의 이야기를 담은 단 군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인 해석처럼 그것이 곰을 신, 즉 토템으로 섬긴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섬긴 부족 간의 정복 또는 결 합을 다룬 이야기로 본다면, 두 부족 사이에는 일정한 갈등 나아가 싸움이 있 었고 이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과정 역시 존재했을 것이기 때 문이다. 나아가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견디는 것을 그런 훈련과정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빈약한 역사의 기록 속에서 그것이 정확히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제2장에서 살펴보았던 다른 지역에서의 상황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우리 체육의 모습이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삼 국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고대국가가성립된 시기이다. 고대국가 란 여러 씨족의 연합체인 부족국가에서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강력한 부족 과 그 부족에서 배출된 왕이 출현해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와 세습적인 왕위 계승체제를 이룬 국가를 말한다. 그리고 이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수준의 관료체제가 발전하며, 이들 관료를 양성 또는 선발하기 위한 학 교제도 역시 마련된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비록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체육 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만 체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교육 역시 시작된다.

관료제

'관료제'란 용어는 지역과 시대, 적용 영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으로 사용되기 때 문에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좁게는 관청 조직과 그에 의한 지배양식을 가 리키지만, 넓게는 특정 집단의 조직과 행동양식까지 그 용례가 확장된다.
관료제의 역사적 기원은 관료기구가 행정을 담당하는 통치지배 조직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 측면은 오늘날까지 관료제를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 소로 꼽힌다. 일찍이 고대문명이 꽃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왕이 관리를 관직 에 임명하여 징세행정 등을 담당하게 하는 관료제적 관행이 나타났다. 이어서 이 지 역 최초로 각 정권을 통일한 함무라비 왕(Hammurabi, 재위 B.C. 1792~B.C. 1750)시대에는 관료제 정부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후 고대 이집트와 로마, 중국에서도 왕정이나 제정을 운영하는 보조 수단으로 각각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관료제 양식이 출현했다. 특히 고대 중국에서 는 메소포타미아나 인도 문화권에 비해 관료제 사회를 떠받친 사회적 기반이 좀 더 안정적이었고, 관료를 배출하는 엘리트층도 높은 지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 다. 관료제적 정치 형태는 각 문화권에 따라 지속성과 영향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 만, 고대 군주제에서 현대 국민국가의 정부체제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의 한 축을 유지해 왔다.
정치형태로서의 관료제의 어원은 18세기 프랑스의 중농주의자 구르네(U.
Gournay)가 사무 책상을 의미하는 '뷰러(bureau)에 지배라는 뜻을 가진 '크러시 (cracy)를 붙인 조어를 창안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관료제를 관청 혹은 관리에 의한 지배로 표현하여 군주제 • 귀족제 • 민주제와 같은 범주의 고전적 정치형태의 하나로 규정한 용어였다. 이후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에서 관료제를 주요한 통치 수 단으로 채택하면서 이 용어는 점점 일반적 개념으로 확산되어 갔다.
20세기를 전후하여 국민국가 및 자본주의 발달이 두드러지면서 관료제는 정치 영역을 넘어 조직화 계층화된 관리운영 전반을 가리킬 때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국가와 기업 등의 조직이 확대 • 활성화 되면서 관료제는 조직구성과 그 운영원리, 구성원의 행동구조 전반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현재 관료제는 일정 규모 이상 성장한 사회집단과 조직에서 필 연적으로 나타나는 관리와 지배 시스템을 가리키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관료제 조직은 국가기관과 공공단체는 물론 기업 • 군대 • 학교 • 정당 • 종교단체 등 대규모 조직이 관련된 사회생활의 전 영역에 존재한다. 이 경우 관료제는 긍정 적 의미로는 엄격한 권한분리와 전문화된 직무, 그리고 합리적 규칙에 따라 목표를 실행하는 관리운영 체계이자 행정기구를 뜻한다. 반면, 경직된 형식을 중시하는 권 위주의적인 제도나 기구를 비판적으로 지칭할 경우에도 관료제에서 파생된 '관료주 의'라는 용어가 보편적인 관용어구로 사용된다.


상위신분을 위한 교육기구의 변천

이제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아보자. 우리 민족의 시작 으로 일컬어지는 고조선의 교육기구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별다른 역사적 기 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농경사회와 관련되는 기상을 주관하는 관리들을 거느리고 인간을 교화했 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방식의 교육을 하였는지 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일정한 정도의 교육은 이루어졌던 것 같다.
교육기구에 대해 기록으로 된 분명한 자료가 나오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이 다. 고대국가 체제가 완성되면서 지배관료의 필수지식으로 유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기구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사료를 통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교육 기구로는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과 신라의 화랑도가 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된 태학은 귀족층을 위한 중앙 교육기구였다. 여기서는 유교 경전과 중국의 역사서, 한자사전과 중국의 주요한 문학서 등이 교육되었던 것 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에는 국자학이라는 학교도 있었다고 하나 그 정확한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신라의 화랑도는 특별히 고정된 학교기구가 없이 일정 연령의 청년들 이 무리를 지어 산천을 유람하거나 스승을 찾아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화랑도는 원화라 하여 미모가 뛰어난 여성들이 지도자가 되고 그 들을 따르는 젊은 남성들이 함께 교류하는 장에서 출발한 자생적 조직이었다.
그러다가 원화 사이의 갈등으로 조직이 해체되자 지도자를 남성으로 뽑고 이 들을 화랑도라 하였으며, 진흥왕 37년(576)에 국가의 공식 조직으로 편성했다.
태학이 귀족 중심의 교육기구였던 것에 비해 신라의 화랑도는 비록 지도적 위 치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평민들도 낭도가 될 수 있었던 기구였다.
백제의 경우 구체적인 교육기구에 대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 본에까지 유학을 전수해 주었던 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을 고려해 볼 때 어떤 형태로든 교육기구가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백제의 관직에는 박 사라는 호칭이 있는데, 전근대시대의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중국의 사례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박사란 유교 경전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자여 서 백제에서도 교육기구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백제에는 의 학과 역학 등을 담당하는 전업박사 제도도 있어 여러 종류의 잡학에 대한 교 육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민족의 통합을 이룬 통일신라와 그 뒤를 이은 고려에 는 크게 보아 유사한 형태의 교육기구가 있었다. 통일신라의 귀족 교육기구인 국학은 신문왕 2년(682)에 설립되었는데, 여기에서는 2개의 학관을 두고 유교 경전과 기술교육을 병합적으로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고 경전의 교육과 정에서는 『논어」와 「효경」이 필수과목이었으며, 이외에 3개의 일종의 전공 영 역을 두고 각각 「예기」와 『주역」, 『좌전」과 「모시」, 『상서」와 「문선」을 교육했다. 또한 지방의 9주에는 역시 관학인 주학을 설립하여 지방의 인재를 교육했 다. 그 밖에 기술교육으로는 산학(0)이 있었으며, 비록 국학에서 교육된 것 은 아니지만 율령학과 의학, 천문학 등의 기술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편 국학에는 '독서삼품출신법'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국학에 다니는 생도 들을 유교 경전 공부 정도에 따라 관료로 선발하는 일종의 과거제도였다. 독서 삼품과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인재의 선발에서 활쏘기로 대표되는 무예를 주요 기준으로 삼았으나 삼국의 통일을 이루어 안정된 체제를 형성하자 무예의 중 요성이 줄어들고 관료의 선발에서 유교적 교양과 학식을 더 중시하게 된 것이 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교육에서 특기할 점은 국비로 지원되는 도당유학생, 즉 당나라 유학제도였다. 한때 한 번에 100여 명에 이를 만큼 많은 수가 파견되었 던 도당유학생은 주로 왕족부터 6두품까지의 상층 귀족 출신이었다.

고려는 처음부터 유교를 국가 운영의 원리로 채택했던 국가였다. 이는 후대 의 왕들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학습할 것을 당부한 태조의 「훈요십 조」에 잘 드러나 있다. 또 고려는 광종 9년(958)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 의로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관료선발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 과거의 주요 과 목이 유교 경전이었으며 이는 고려의 교육제도를 통해 교육되었다. 고려의 대 표적인 교육기구는 성종 11년(992)에 설립된 국자감이었다.
국자감은 국자학,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학교의 입 학자격은 신분에 따라 4단계로 나뉘었다. 그중 유교 경전 교육을 중심으로 하 는 국자학과 태학, 사문학을 제외한 율학, 서학, 산학의 기술학에는 원칙적으 로 평민의 자손도 입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편, 예종 4년(1109)에는 기존 의 6개 학교가 7재(3)로 바뀌었는데, 여택재(주역, 전공), 대빙재(상서, 전공),  경덕재("모시」 전공), 구인재(*주레, 전공), 복응재(*대레, 또는 『예기」 전공), 양정 재(『춘추, 전공), 강예재(무술 전공)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여택재에서 양정재까 지는 유학 전공반이었고 강예재는 무술 전공반이었는데, 이는 이전의 기술학 부가 없어지고 무예학부가 생겼음을 알려 준다. 이처럼 강예재와 같은 무술 전 공 과정을 국가의 최고학부에 설치한 것은 고려의 국자감에서만 찾아볼 수 있 다. 한편 고려 말에 이르러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공민왕 11년(1362)에 국학에서 이름이 바뀐 성균관은 이후 조선의 최고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으로 발전되 었다. 그 밖에 성균관의 하위 학교로서 수도에는 학당을 두고 각 지방에는 향 교가 설치되기도 했다.
고려의 교육에서 신라와 다른 점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는 사학십이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사학십이도는 유명한 스승을 따라 모 여든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문종 9년(1055)에 최충이 설립한 문헌공도가 그 시초였으며 모두 수도인 개경에 설립되었다. 한편 지방에는 조 선시대의 서당과 유사한 초등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역시 사설기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 중심이었던 고려가 비록 과거제도는 마련했지만 음서제도와 같이 관직 에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열어 두고 있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관료가 될 수 있는 가장 주된 통로가 과거제도였다. 따라서 조선의 교육기구는 과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형성되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대부분 양반의 자제 들은 대개 어릴 때 서당에서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고 15~16세 이전에 서울은 학당, 곧 사학(특)에, 지방은 향교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몇 년 뒤에 과 거의 소과(1FH)에 응시,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얻었다.

서울에 설립된 성균관과 학당(사학)은 중앙정부의 직속기구였고 향교는 각 주 현(WWW)에서 관할하던 관학(1)이었는데, 그중 성균관은 조선 후기까지 줄곧 최고학부로서의 시설과 권위를 유지했으나 사학과 향교는 후세에 점점쇠퇴해 서 유명무실하게 되고 그 대신 일종의 사립교육기구로서 서당 외에 서원이 기 세를 떨치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한 조선사회의 특성을 반영하여 무과(#자) 계통의 교육기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선조 이후 지방의 대도호부에 무학이라는 무예교육기관을 세워 기병 중심의 실기교육을 실시했 다. 또한 기술직과 관련한 교육기구로는 태종 때 심학(+북)을 설치해 이학약ㅃ) • 역학(품부) • 음양풍수학(속)% (가복) • 의학 • 자학(국복) • 율학(#부) • 산학(# 북) • 악학(#북) 등의 교육을 위한 시설을 두었다. 그러나 잡과는 특수한 신분층 이 이를 세습했기 때문에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의 기본법제서였던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학(0) • 몽학(*4) • 여진학(51개4) • 왜학(초북) 등 외 국어 교육은 사역원(E)%;.)과 그 나라와의 교류가 빈번한 특정 지방에서, 의학 (특)은 전의감 • 혜민서와 지방의 각 고을에서, 천문학 • 지리학 : 명과학(슈 품부)은 관상감에서, 주학(**)은 호조(F#)에서, 율학(()은 형조와 지방의 각 고 을에서, 화학(배)은 도화서에서, 도학()은 소격서에서 각각 일정한 수의 학생을 가르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선의 기술교육이 일종의 공적 도제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런 조선의 교육제도는 개화기에 이르 러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음서제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특권신분층인 공신과 양반 등의 신분을 우대하고 유지하기 위해 후손을 관리로 뽑았던 제도. 신라시대에 공신의 자식에게 관직을 주었던 사례 를 따르고 중국의 음보제를 수용하면서 왕족이나 중신의 후손을 관리로 임용했다.
고려시대의 음서제도는 점차 범위가 확장되고 나ㅎ이 제한이 없어지면서 확대되어 문벌귀족 중심 사회의 세습에 기여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음서제도를 축소했 으나 후기에 이르면서 과거로 관리가 되기 어려워지자 음서제도를 이용하여 출사 하는 사례가 점차 많아졌다.


전근대사회 평민도 학교에 다녔을까?

앞에서 살펴본 각 시대의 교육기구는 대부분 상위신분의 사람들, 특히 남성 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근대사회의 평민이나 여성도 학교에 다 닐 수 있었을까? 고구려의 태학과 통일신라의 국학은 귀족들만을 위한 교육기 구였다. 신라의 화랑도와 고려의 국자감은 평민도 받아들였지만 그 위상에 제 한이 있었다. 즉, 신라의 화랑도에서 지도자격인 화랑은 상위신분의 사람들만 맡을 수 있었고 평민은 화랑의 지휘를 받는 낭도만 될 수 있었으며, 고려의 국 자감에서 평민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기술직 분야뿐이었던 것이다. 반면, 설 립 초기 아직 신분제가 확고히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의 경우 노비를 제 외한다면 교육기구의 입학에도 신분에 따른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의 교육기구가 과거의 준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과거 준비를 위해서는 장기간의 공부를 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신분에 따라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에 제한이 있었을 것으로 짐 작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근대사회에서 평민이 교육을 받을 기구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평민을 위해 설립되었던 대표적 교육기구로 고구려의 경 당을 들 수 있다. 태학이 중앙에 있는 교육기구였던 것과 달리 지방에 설립된 경당은 주로 평민이 다녔던 교육기구로 보인다. 특기할 것은 경당에서 독서는 물론 활쏘기가 교육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경당이 문무의 교육을 병행한 교육 기구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고려와 조선에서도 초등 교육기관인 서당에는 평 민의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학교 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실 제로 교육기구를 이용했던 평민의 비율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학 교에 다닌 평민의 수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고려시대 국자감의 정원 이 300명이었고 조선시대 성균관의 정원이 200명에 불과했던 것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국자감과 성균관의 정원은 당시 상위신분의 인구수와 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관직의 수를 감안하여 결정된 것이었겠지만,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최고 교육기구의 정원이 300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근대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인구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는지를 시사하 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전근대사회에서 평민은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지 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교육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는 오늘 날과 같이 교통, 통신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주요 지역에 설립된 학 교를 다니는 것이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성에게는 그나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막혀 있었다. 그 결과 전근대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신분에 따라 또 성에 따라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들에 대한 체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근대사회 신체활동의 일반적 모습

전근대사회는 기본적으로 신분에 따라 모든 것이 구분되었던 신분사회였다.
신라의 골품제, 고려의 귀족제, 조선의 양반제 등이 모두 신분을 나누는 기제 였다. 신분제 사회는 신분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누고 그 결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나는 사회이다. 당연히 신체활동도 신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런 차이를 단순화해서 우리는 노동과 훈련의 차이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즉, 낮은 신분의 사람들인 평민들에게 주된 신체활동은 노동이었다. 그리고 농 업이 주를 이루었던 사회에서 일부를 제외하면 그 활동은 대부분 농사일로 이 루어졌다. 반면, 상위신분의 사람들에게 신체활동은 서구 사회에서와 비슷하 게 군사훈련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고려 이후에 두드러지듯이 이런 군사훈련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관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록 무 신의 난과 같은 것을 고려하더라도 고려시대까지는 상대적으로 문과 무의 구 분이 덜 뚜렷했던 편이었고, 그 결과 군사훈련은 상위신분의 사람들에게 상당 히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활동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초가 지나면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오랜 평화기가 지속되어 군사훈련의 중요성이 더욱 약화되었지만 문 관 집안인가 무관 집안인가에 따라 그에 부여하는 비중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이 지녀야 할 자질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활쏘기는 문관에게도 널리 장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병농일치제. 즉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는 군사로 복 무하는 제도를 택하면서 국민 모두에게 군역을 부과했으므로 이를 위해 평민 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무예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그 정확한 모습을 확 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전근대사회의 신체활동이 모두 노동과 훈련으로만 이루어졌던 것 은 아니다. 농민이 주를 이루던 하위신분의 사람들도 명절 때의 축제라든지 농 한기의 상대적 휴식기에는 노동 외에 별도의 신체활동을 즐겼다. 주로 놀이 형 태로 이루어진 신체활동이 그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놀이에 상위신분의 사 람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주를 이루었던 사람들 은 평민이었다. 반면, 정신노동에 종사하던 상위신분의 사람들, 특히 문신들이 즐겼던 건강을 위한 별도의 활동도 존재했다. 이른바 양생을 위한 신체활동이 그것인데,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가 즐겨 했다는 활인심방(FAL b) 이라는 실내체조 형식의 맨손체조가 대표적이며, 실학자인 서유구는 이 양생 법에 비해 좀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운동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평민의 놀이 가 대부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상위신분의 양생활동은 개인적으로 이루 어졌으며, 평민의 놀이가 농한기와 농번기, 주요 절기 등 일정한 기간에 이루 어지는 것이었다면 상위신분의 양생활동은 그런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비교적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었다.


학교에서의 교육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근대사회에서의 학교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 학교에서 신체활동에 대한 교육이 어느 정도나 이루어졌 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고구려의 경당과 신라의 화랑도, 고려의 국자감에서 문무의 교육이 함께 이루어졌고 군사훈련과 유사 한 신체활동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삼국시대의 경우 삼국의 경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문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 고 양자의 균형을 추구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의 경우 7 중 한 곳에서만 무술교육이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어 나머지 기구 에서는 신체활동에 대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관료의 대표적인 등용문이 된 과거제도에 무과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비록 그 대상은 제한되더라도 무술을 비롯한 신 체활동에 대한 교육이 분명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술, 특히 무과에 급제할 수 있을 만큼의 상위 수준의 무술은 매우 정형화된 신체활동을 의미한다. 특히 무과시험의 주요 내용이었던 기마술과 궁술, 창술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세부 적인 평가기준 역시 마련되어 있어서 과거에 합격하려면 이 무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체계적인 교육 없이 단지 개인의 훈련만 으로 이런 정형화된 신체활동을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비록 국가 차원에서의 공식화된 교육기구는 아니었을지라도 일종의 사립 학교 형태로서 무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관이 있었거나 아니면 병사로 차출되 어 현직에 종사하면서 무술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고려에 비해 무과의 과거제도가 훨씬 체계화되고 선발 인원도 많았던 조선에서는 무과의 준비를 위한 어느 정도의 틀을 갖춘 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공식 교 육기관에서는 그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다만 이미 선발된 무사들의 무예훈련 을 독려할 제도적 장치로 연재() )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연재는 무사들의 무에 실력을 평가하여 상벌을 가한 것으로 이를 통해 무사들의 능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전근대사회 학교에서 체육은 극히 일부의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이루 어지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체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 문이라기보다는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적 활동에 서 신체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평소 의 활동에서 신체활동이 많이 이루어지다 보니 학교교육에서까지 별도의 시간 을 두어 신체활동을 교육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체육이 이루어졌던 소수의 사례는 평소의 활동에서 습득하기 힘든 별도의 기량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학교 바깥에서의 관습적 신체활동

신체활동이 반드시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처럼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신체활동은 체육에 포함되지 않지만, 제2장 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체육의 범위를 넓게 잡는다면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진 신체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학교 바깥에서의 신체활동이 이루어졌던 장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국가적 의례와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신체활동이다. 지금과 같은 국경 일이 제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전근대사회에도 국경일과 유사한 의례일이 있 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의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의례가 대표적이다. 이런 의 례의 뒤에는 다양한 여흥의 행사가 마련되었고 그중에는 신체활동이 주가 되 는 여흥도 존재했다. 전통사회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탑돌이와 같은 행사가 대표적 사례이다.
둘째, 세시풍속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신체활동이다. 농경사회였던 전근대 의 우리 사회에서는 농사의 시기에 맞추어 풍요를 비는 다양한 의례가 발전했 다. 설과 추석 등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명절을 비롯해 단오와 백중 등 시기에 맞춰 정기적으로 제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제의 뒤에도 어김없이 여흥 이 베풀어졌는데, 현재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민속놀이들은 대개 이런 제의 뒤의 여흥으로 즐겼던 놀이이다. 씨름이나 차전놀이, 석전(FW), 강강수월래, 사람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소싸움 등이 그 예이다.
셋째, 개인의 성장과 연관지어 이루어지는 신체활동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중시되었던 관혼상제에서 '관'은 개인이 성장하여 성년이 되는 시기와 연관된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개인이 성년에 도달했다는 것의 의미를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성년이 됨으로써 공동체 속에서 그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성년이 된다는 것이 남성의 경우에는 생산활동, 여성의 경우에는 재생산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런 중요성 때문에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다양한 통과 의례가 발전하기도 했다. 그런 전통은 후대에까지 길게 이어졌는데, 많은 연구 자는 신라의 화랑도를 이 성년을 위한 통과의례와 연결짓기도 한다. 어쨌든 전 근대사회에서는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신체적으로 증명하는 시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훈련이 이루어졌 을 것이다. 즉, 성년식 때 이루어지는 신체활동은 물론이고 이를 준비하기 위 해 이루어진 신체활동도 비록 체계적으로 교육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체육에 비견될 수 있는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넷째, 순수한 여흥 또는 놀이를 위한 신체활동도 있었다. 왕을 비롯한 상위 신분의 사람들이 수렵을 즐긴 것이라든지 평민들이 농한기에 즐겼던 다양한 놀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성인들도 농한기에 여러 놀이를 즐겼지만 특히 활동 기의 아동들은 농한기인 겨울철에 썰매타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등을 하며 여 가시간을 보냈다.
한편 전근대사회의 교육이 남성에게만 허용된 것이다 보니 여성들의 신체활 동은 모두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동지방에서 성행했고 여 성들에게만 허용되었던 놋다리밟기나 남녀 모두가 할 수 있었지만 주로 여성 들이 참여했던 강강수월래, 널뛰기, 그네뛰기 등이 여성들이 즐겨 했던 신체활 동이었다.
더불어 전근대사회의 신체활동에서 특기할 점은 지역성을 지닌 활동이 많았 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놋다리밟기나 차전놀이는 안동지방에서, 강강수월래는 남해안 지방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것이 이를 보여 준다. 이는 교통, 통신이 제 대로 발달되지 않았던 전근대사회의 특성과 연관된 것으로 이런 활동들은 오 늘날까지도 각 지방의 고유한 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성년식
어느 사회든지 연령에 의해 사람들을 구별하는 습관 및 제도가 있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구별은 성에 의한 구별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기준에 의한다. 이때 한 집 단에서 다른 집단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는 기점에서 성년식을 하게 된다. 이 의례 를 거침으로써 온전한 성인집단에 편성되며 성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게 되고, 사 냥이나 농사 등의 제반 마을일에 참여할 권리를 얻게 된다.
한국의 성년식은 대략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양반 자녀들의 경우에 남자들은 관 례를 올려서 관을 쓰고 붓과 벼루를 하사받아 장차 문필로 세상을 살아갈 대우를 받 는다. 여자들은 계례를 올려 머리를 올리는데, 주로 결혼 직전에 혼례식과 함께 올 리는 것이 보편적이다.
반면, 평민의 자녀들은 노동력을 과시함으로써 성인식을 거친다. 칠월 백중에 '들 돌(제주도에서는 똥돌, 전라도에서는 진서돌이라 부름)이라고 부르는 무거운 돌을 들어 서 힘겨룸을 하고, 마을 어른들에게 '진서턱'이라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신고식의 일 종인 성년식을 거친다. 진서턱을 낸 자만이 당당한 성인의 일원으로 품앗이에서 동등한 임금과 노동력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전라도 지역에서 진서를 내는 날은 특 별히 '술멕이날'이라고 부를 정도로 술을 내어 잔치를 벌인다.


전근대사회에서 체육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전근대에 체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체육이 심 신 양면이 조화롭게 성장하여 완성된 인간을 이루는 과정에서의 한 축을 의미 하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의 전근대에는 이런 의미의 체육 개념이 전혀 존재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이 지향했던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군자는 육체와는 무관하게 주로 정신적인 존재였으며, 대다수 평민들은 그나마 그 완성된 존재를 향해 나아갈 교육 기회로부터 거의 배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사회에서의 체육을 살펴보는 것에는 그 나름의 의 미가 있다. 먼저 전근대사회의 체육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신체활동이 누구에 게 허용되고 배제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와 마 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도 교육이 허용된 사람과 교육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특정 신체활동이 허용되었던 사람과 불허되었던 사람이 있었다. 이는 우리가 현재 또는 미래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체육을 통한 자기 완성의 기회를 줄 수 있으려면 무엇이 선결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또한 전근대사회의 체육을 공부함으로써 우리의 관념이 우리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근대시대의 사회에서 완성된 인간의 개념에는 육체의 차원이 대부분 결여되어 있었다. 그 결과 적어도 고려시대 이 후의 사회에서 신체활동은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고려시대 이후의 사회가 몽고와 왜, 여진 등 여러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린 것은 육체를 무시해 문약해 진 이런 관념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신체활동 또는 체육의 중요성이 재인식된 것은 개화기에 들어와서이다. 그런 변화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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