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을 때마다 지나치는 초등학교의 교문 앞에는 매일 많은 학부모가 진을 치고 자녀를 기다린다. 하고 시간이 되면 갓 입학한 초등학생들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교문으로 몰려나와 기다리던 부모에게 달려간다. 반갑게 아이 들을 맞은 학부모들은 가방을 건네받아 혹은 손을 잡은 채 혹은 차를 탄 채 집 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는 도중 부모와 아이들은 오늘 하루 학교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조금 관 점을 달리해서 보면 의아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들은 왜 이런 번거로운 일 을 매일 되풀이하는 것일까? 왜 아이들은 매일 아침 졸린 눈을 억지로 비벼 떠 야 하고, 학부모들은 그들을 학교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 사회에서 초등학교가 의무교육기관이어서 일정 연령의 아이들은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일정 연령의 아이들을 반드시 학교에 보내도록 의무화한 것일까?
학교는 사회화(socialization)의 주된 기관 중 하나이다. 사회화란 생물학적인 존재인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즉, 특정 개인을 그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회와 개 인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사회화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먼저 사회화를 사회가 원하는 유순한 존재를 기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산업 혁명과 함께 산업계의 요구에 따라 초등학교가 만들어진 것이 이를 보여 준다.
반면, 사회화를 사회에 적응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사회를 이루는 것이 인 간의 핵심 특성 중 하나라고 파악한다면 사회화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사회화란 특정 개인이 그의 인간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 된다는 것이다. 에버레트 라이머(Evereit Reimer)가 "학교는 죽 었다"라고 선언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학교도 바로 이 후자의 사회화를 진행하는 학교일 것이다.
사실 사회화의 대행기관으로서 학교는 이 양자의 기능을 모두 수행해 왔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둘 중 어느 쪽이 중시되는가에는 차이가 있다. 보수적인 분위기라면 전자의 기능이 강조될 것이고, 진보적인 분위기라면 후자의 기능 에 좀 더 방점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학교가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물론 학교는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파이데이아가 존재했고 이는 로마 시대의 후마니타스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시대를 거치며 이런 교육의 맥은 끊어지며, 학교교육이 다시 복원되는 것은 11세기 이후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 서 대학이 생긴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이때의 대학은 법대와 의대, 신학대학 등 일종의 기능인 양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기관으로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종합대학, 또 초중고등학교의 상위 학교로서의 대학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학교가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부터 초등학교가 만들어지고 그 후 중등학교가 설립된 후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까지 이르는 학제의 틀이 자리 잡힌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이런 근대적 학교가 그 이전의 학교와 다른 근본적 차이는 그 이전의 학교가 일부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보편교육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근대사회는 왜 학교를 필요로 했을까? 이는 근대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두 개의 혁명, 즉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모두 교육 받은 시민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가 수행하는 두 가지 기능 사이의 모순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학교에 요구한 지향의 차이로도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근대적 학교의 성립 배경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목표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이는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지녔던 모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먼저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더 많은 이 윤의 추구라는 자본주의의목표에 부합하도록 사회 구성원을 훈련시키는 것을 지향했다.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된 초등학교의 사례를 보자. 기본적으 로 초등학교는 산업사회의 틀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 농경사회의 구성원을 산 업사회의 틀에 맞도록 변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초등학교의 교과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른바 숨겨진 교과과정(hidden curriculum)은 등하교 시간의 준수라든지 교사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같이 산업사회의 틀에 잘 적 응할 수 있는 인간의 양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프랑스 혁명,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민주주의 체제의 이념 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교육 목표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 혁 명은 그때까지 인류사회에서 지속되었던 전제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 이 를 민주적인 체제로 변혁시켰던 혁명이었다. 처음에는 신분 나아가서는 성, 궁 극적으로는 어떤 차이와도 무관하게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보편적인 주권자로 서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 했던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었다. 이런 이념 속에서 교육 목표는 권력자의 정보 독점을 깸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주권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학교는 이 모순되는 두 이념을 동시에 구현하려 하면서 시기에 따라 어느 한쪽에 더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사회의 학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요약하면 초기의 우리 사회의 학교에서 이 두 이념은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 제강점기 이후 독재정권까지는 전자의 이념이 좀 더 우월한 모습을 보인 반면, 민주화 이후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는 후자의 이념에 우선권을 부여하려는 시 도가 엿보인다.
물론 어느 시기에도 두 이념이 제일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 교 육 초기의 우리 사회에서 두 이념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 자체가 서구 문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미처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 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는 어느 정도 바뀌었으나 그 때에도 체제의 통제력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특정 학교 또는 특정 교사가 다른 방 식의 교육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존재했다. 과거 독재체제의 틀 속에서 도 이른바 참교육을 추구하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구성 하러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결국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후자의 이념이 좀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전자의 이념을 지니고 있는 학교와 교사는 여전히 존재한다. 결국 우리가 교육 과 관련해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좀 더 우세한 경향의 차이와 관련해서일 뿐이다.
사회화의 양면적 의미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체육교육 역시 양자 사이를 오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순화하면 개화기의 학교체육이 좀 더 체제를 개혁 하는 쪽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면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 이후의 독재 정권에 이르는 시기의 체육교육은 유순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를 양성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반면, 민주화 이후의 교육은 여러 난관을 뚫고 더 많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제 그 변화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숨겨진 교과과정(hidden curriculum)
숨겨진 교과과정은 학교에 다님으로써 얻게 되는 부수효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명시적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배우게 되는 내용'이 숨겨진 교과과정이다. 교실 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전수되는 규범이나 가치, 신념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모든 학습경험은 바라지 않는 교육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숨겨진 교과과정은 대 개 초중등학교의 상황 속에서 획득된 지식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것은 부정적 함의 를 지니게 되는데, 이는 학교가 동등한 지적 발전이라는 긍정적 목표를 향해 노력하 는 것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숨겨진 교과과정은 학생들을 그들의 계 급과 사회적 지위에 맞춰 교육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 내에서 문화자본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지 식이 그와 유사하게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에 상응한다. 특기할 것은 쉬는 시 간이 숨겨진 교과과정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교육개혁을 향한 분투
학교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후속 세대에게 선대의 축적 된 지식을 전해 주고 사회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사회화의 의미에서 학교를 정 의한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학교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제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대에 따라 명칭은 바뀌고 교육내용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상위신분의 자제를 적절히 교육시킴으로써 다음의 지배층을 길러 내고 이를 통해 체제의 연속성을 이어 가려는 목적에서 이미 고대시대부터 여러 학교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의 틀이 근본적으로 뒤바뀐 것은 근대적 학제가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19세기 말부터 우리 사회에 서구의 학제가 도입되어 과거의 틀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의 명칭과 구성이 바뀌었으며 교육내용 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구성도 이전과는 판이해 졌다.
하지만 이 시기 설립된 학교의 성격에는 아직 모호한 점이 존재했다. 사실 일제강점기 이전 여러 학교는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정확히 어느 수준의 학교 인지 그 구분이 애매하다. 이는 규정상 소학교와 상급학교가 나뉘어 있었지만 이 규정을 채울 현실적 여건은 아직 미비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재의 이화 여자 중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모체가 된 이화학당을 생각해 보자. 처 음 이화학당에 입학한 학생이 가난한 집의 소녀나 고아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화학당의 초기 학생 모집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화학당에 입학하 기 위해 사전에 갖춰야 할 자격요건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화학당 을 졸업한 후 진학할 상위의 고등교육기관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화학당은 초 등학교였는가 중학교였는가 고등학교였는가, 아니면 대학교였는가? 이 학교들이 서구 중세의 대학처럼 뚜렷한 기능인의 양성을 도모했던 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분류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교육 이념과 관련해서 볼 때도 일제강점기 이전 학교들의 정체성은 아직 모 호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 학교들은 크게 정부가 주도한 관공립학교와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계 학교, 그리고 선각자들이 세운 사립학교로 나뉠 수 있다. 그중 선교사들이 설립했던 학교에서는 다소의 차이가 엿보이기도 하 지만 이 시기의 학교는 대부분 쇠퇴해 가는 조선의 현실을 돌파해 부국강병을 실현하려 했던 선각자들의 의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전통교육을 개선하는 쪽과 서구의 교육체제와 내용 을 받아들이자는 쪽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원래 우리 교육의 개혁에 대한 요구는 유형원과 홍대용, 정약용 등 조선 후 기의 실학파를 중심으로 제기된 바 있다. 이들은 조선의 기존 교육이 형식적으 로 하급학교와 상급학교의 체제가 분명히 정립되어 있지 않고, 내용적으로는 성리학 일변도의 교육이며, 교육 대상으로 평민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 했다. 그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향리의 서당에서부터 향교와 서원을 거쳐 중앙의 성균관에 이르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과, 철학적 내용에만 치우치지 않는 실학의 교육, 그리고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재를 망라하는 보편교육이 었다.
하지만 실제로 교육을 개혁할 필요성이 왕실을 비롯한 고위층에까지 인식된 것은 1876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일수호조규(F) B (AF1%5%), 즉 강화 도 조약에 의해 강제로 개항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었다. 이때의 충격은 그 후 일본과 나아가 일본이 모방했던 서구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그런 속에서 개화파를 중심으로 서구식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이자는 요구가 제 출되었다.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던 김홍집과 조준영, 개화파였던 김옥균과 박영효, 유길준 등이 일본과 서구의 교육을 참조하여 우리 사회의 교 육을 개혁할 것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기본적으 로 이런 개화파의 방향을 택한 것이었다.
반면, 교육개혁을 지향하는 방향 중에는 명칭은 바꾸더라도 전통적인 서당과 향교, 성균관 등의 기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교육내용에 근대적인 내용을 담으려고 하는 방향도 있었다. 1896년과 1899년 공포된 '흥학훈령'이 그런 방 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훈령은 동• 리 : 면 • 군에 학교를 설립하고 그 상위에 는 최고 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을 두어 유학교육기관을 체계화하는 방안을 도모 한 것이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신식교육과 전통교육을 결합하는 방법을 취하 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교육개혁의 방향과 관련하여 전통교육의 내용을 어 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상이한 입장이 존재했음을 알려 준다. 실제로 비록 근 대적 내용을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 심지어 해방 이후까지도 상 당 기간 존속했던 서당의 존재가 전통교육 보존파의 영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두 방안 중 좀 더 우세한 힘을 얻은 것은 학제 자체를 서구식으 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기초가 된 것은 1894년의 갑오개혁이었는데, 갑오개혁 은 강화도 조약 이후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전반의 개혁방안이었으며, 그 속에는 서구식으로 우리 교육제도를 개혁하려는 방안도 포함되었다. 갑오 개혁을 통해 소학교와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의 설립과 관련한 법령이 만들어 졌고, 이 법령에 따라 여러 교육기관이 설립 • 운영되었던 것이다. 특히 1897년 에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소학교의 확장에 힘을 쏟아 1898년 전국에 20개 의 공립소학교를 신설하기도 했다.
물론 근대적 학교가 갑오개혁 이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개항 직 후 1883년에 이미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원산학사가 설립되어 근대적 교육 을 시작했는데, 원산학사에서는 산수, 물리, 외국어 등의 근대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다. 또한 1883년 정부는 외국어 통역관을 양성하고자 동문학을 세웠으 며, 1886년에는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헐버트(H. B. Hulberi)와 길모어(G. W.Gilmore) 등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젊은 현직 관료와 양반 자제들에게 수학, 지리학, 정치학, 영어 등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같은 해에 서양의 선교사들은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의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이 시기 만들어진 학교에서 정확히 어떤 내용의 교육이 이루어졌는지를 확 인하기는 쉽지 않다. 전반적인 학제의 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 학교의 위상도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소학교의 교육과정은 기본적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우리 사회 사람들에게 서구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 루어지지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형식은 어느 정도 갖춰졌지만 그 내용 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외국어 학교와 같이 기능중심적인 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그런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혼란 속에서 대한제국에서 시행된 것은 소학교와 교사 양성기관의 설립 정도였고 본격적으 로 교육체제의 개편이 이루어진 것은 통감부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었다.
을사늑약과 일제의 교육 지배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교육에 있어서도 대한제국의 자주권은 상 실되고 만다. 을사늑약 이후 1906년에 설치된 통감부는 교육 업무를 통제하기 위해 학정참여관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대한제국은 교육에 관한 모든 사 항에 대해 일제가 임명한 학정참여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일제가 한국 정부 의 인사에 관여하기 시작한 때는 이미 1894년의 청일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한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배치하였으며, 통감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고위관리를 임명할 때 반드시 통감의 동의를 받도록 하였지만,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칠조약)에서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문제도를 폐지하고 아예 일본인이 직접 한국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08년 이 되면 일본인 관리의 수가 조선인 관리의 수를 능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한일합병이 되기도 전에 이미 일본인이 한국 정부의 실권을 장악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나타났다.
교육현장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관공립학교의 교장은 한국 인이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학감과 교감에는 모두 일본인이 배치된 것 이다. 이처럼 통감부가 공교육을 장악하면서 여기에 반발하여 사립학교 설립 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을사늑약 이후 보성학교(이용익), 양정의숙(엄귀비), 휘 문의숙(민영휘), 명진학교(조계종), 중동학교(신규식), 대성학교(안창호), 오산학교 (이승훈) 등 민족독립을 추구하며 선각자들이 세운 사립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는데, 1909년에 이르면 이런 사립학교의 수가 무려 1,600여 개에 달 하게 되었다. 당연히 일제 통감부는 이런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1908년에 사립학교령을 제정하여 학교의 설립을 규제하고 교과내용에서도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내용을 제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많은 사립학교에서 국어와 국 사 등의 교과서를 직접 편찬하여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일제 의 탄압에 의해 사립학교는 침체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교육입국을 주장하던 여러 선각자 사이에서 전 통적인 유학교육의 틀을 포기하려고 하는 경향이 점차 우세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권상실의 위기 상황을 맞아 서구식의 부국강병을 빨리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당장의 주적인 일본에 맞서 우리의 것 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도 존재했다. 그 결과 이들 사립학교에서는 서구지향의 기존 교육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을 결합시키려고 했다. 국어와 국사 교 육을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통감부
1906년 일본이 조선을 관리 • 감독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자 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형식상으로 대한제국 의 내각회의를 거쳐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통과되었으며, 제3조에 대한제국 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가 통감이라고 규정되었다. 1906년 2월 1일 통감부 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통감정치의 실시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수적인 폭력기구를 급격히 확대 • 강화해 무단통치 실현의 기반을 마련했 다. 이에 국권회복을 위한 저항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제국 황 실의 헤이그 밀사 파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자결 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체결되고 완전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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