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중요하다는 생각
우리는 조선시대의 우리 사회가 무(a)를 천시하고 문(X)을 중시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결과 체육을 비롯한 신체활동에 별다른 중요 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 대한제국의 성립 을 전후하여 이런 경향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한다. 전반적으로 교육의 중요성 이 강조되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체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조선 말기만 하더라도 체육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성립기에 개화 또는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팽배하고 교육개혁이 시도되면서 체육이라는 낯선 개념이 빠르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변화와 더불어 체조를 비롯하여 서구에서 들어온 팀 스포츠 역시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했다.
체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이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은 1895년에 반포된 고종의 교육조서이다. 여기서 교육의 3대 강령으로 덕육(1 합), 체육(1), 지육(쌀밥)을 나열하여 체육이 중요함을 선포한 것이다. 이 조서 에서 고종은 "체양(W)은 항상 부지런함에 힘씀을 주로 하고, 안일을 탐내지 말며, 고초를 피하지 않음으로써 근육과 뼈대를 튼튼히 하여 건강무병한 즐거 움을 누리게 하라"라고 권고한다. 즉, 건강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 체육에 힘쓰 라는 것이다.
물론 고종이 반포한 교육조서의 내용이 그의 개인적 판단의 결과라고 보기 는 어렵다. 그 배경에는 강화도 조약의 체결 이후 서서히 축적되어 온 국가개 혁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세의 압박에 시달리던 당시의 상황 에서 선각자들은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었는데, 체육 은 바로 그 구국을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한편 교육의 다양한 영역 중에서도 이처럼 체육이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당시 서구 선진국들에서 전반적으로 체육을 강조하고 있었던 현실을 꼽을 수 있다. 즉, 19세기 중반의 서구 사회에서는 의학과 생리 학이 발전하고 사회진화론이 대두하면서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생학적담론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체육에 대한 관심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런 서구 사회의 체육 중시 사상이 여러 경로를 통해 우 리 사회에 들어오면서 당시 선각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형성된 체육 중시 사상이 모두 단일한 형태를 띠었던 것 은 아니었다. 먼저 들어왔던 사상은 이른바 위생체육 또는 양생체육 사상으로 고종의 조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개인의 건강을 위해 위생을 살피고 운동을 해 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구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쓴 여행기 「서유견문」을 저술 해 근대사상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유길준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위생 론자였다. 그는 운동의 일차적 의미가 양생, 즉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도록 건 강하게 사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1895년 학부령으로 설립된 한성사범학교의 규칙 제13조 제4항에서“신체의 건강함이 학업을 성취하는 데 기본이므로 학생들은 평소 위생에 유의 하여 체조를 열심히 하여 건강을 증진시켜야 한다"라고 규정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국 민 계몽에 앞장섰던 「독립신문」에서도 위생과 운동을 동일한 차원에 놓고 있 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건강증진을 위한 수단, 즉 위생으로서의 체육에 강조점을 두 던 우리 사회의 체육사상은 을사늑약을 계기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을사 늑약으로 국권이 위기에 처하면서 구국사상이 강력하게 촉발되었던 것이다.
특히 1907년에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 되었다. 이는 체육사상에도 영향을 미쳐 단지 개인의 건강증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이루는 수단, 전투 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체육을 규정하는 생각이 발전했다. 물론 이런 사상은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을사늑약 이전에 도 어느 정도 존재하던 것이었으나, 을사늑약의 체결과 함께 국가의 무력을 형 성하는 기반으로 체육을 바라보는 사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 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상가였던 박은식은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문을 숭상하 고 무를 천시하여 문약해진 것을 비판하며 상무교육을 강조했다. 이처럼 군사 훈련으로 체육을 강조하고 국력의 기반으로 체육을 바라본 사상을 상무체육사상으로 얘기해 볼 수 있다.
위생체육과 상무체육의 두 사상은 시기적으로 공존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상 황에 따라 강조점을 변화시키면서 우리 사회에서 체육에 대한 생각이 형성되 는 데 영향을 미쳤다. 과거 1980년대까지의 독재체제하에서 우리 사회의 구성 원들이 체력장과 같이 일종의 군사훈련으로서의 체육에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 지 않았던 것에는 일제강점기 말의 경험과 함께 근대 체육 성립기의 경험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생각의 변화는 신체활동을 폄하하 던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에서 근대 스포츠를 비롯한 체육이 본격 적으로 시작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해 주었다.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사회가 일정한 방향으로 진화 • 발전한다고 보는 이론. 19세기 중엽 영국의 철학 자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역학에서 처음 주장되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간 사회의 생활을 생존 경쟁으로 보았고, 그 투쟁은 적자생존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 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구 변동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우수한 경쟁 자가 살아남고 인구의 질이 계속 향상된다고 믿었다. 사회진화론은 이후 제국주의 적 • 식민주의적 • 인종주의적 정책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 나 사회진화론은 20세기 이후 생물학적 • 사회적 • 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 되고 그 이론구조가 배격되면서 쇠퇴했다.
우생학(eugenics, 소북)
우수한 유전자를 보존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상. 영국 인류학 자 프랜시스 골턴이 만들었다.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하기 위한 조건 등을 연구 했다.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우생학의 기본 전제는 각종 차별을 합리화 하는 근거가 되었다. 독일 우생학을 앞세운 나치 정권의 경우 가장 먼저 환자들과 신체장애인 및 정신장애인을 탄압했으며, 이후 장애인과 성소수자, 유대인 등을 학 살하기에 이른다. 서구 사회에서 우생학은 인종차별주의와 결합했으며 사회적 약 자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체조와 운동회 시절
생각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와 연결된다. 체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생각이 바 뀌면서 체육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지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체육활동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신체활동이라면 모 르지만 체육, 이세돌 더 나아가 근대 스포츠는 일정한 형식에 따라 몸을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특정한 도구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활동을 하기 위한 적합한 장소, 즉 체육 시설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축구장과 농구장에 대 해서는 정확한 규격이 존재하며 축구의 골대와 농구의 림에 대해서도 따라야 할 규정이 있다.
그런데 근대 초기의 우리 사회에는 이런 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 다. 체육활동을 위해 따라야 할 형식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도구와 시설 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근대 초기 우리 사회에서 처음 시 작된 체육활동은 체조였다. 별다른 장비나 시설이 필요하지 않고 형식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누구든 쉽게 할 수 있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체조, 그중에서 도 군사훈련과 유사한 병식체조가 초기 체육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이 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병식체조의 경우 군대에서 훈련의 일환으로 이루어지 던 것이고 우리보다 앞서 체조를 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이다. 실제로 초기의 학교 체조교육에서는 군에 조회하여 무관 졸업생을 보내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때의 신식 군대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었다.
당시 체조교육은 그 시기에 처음 생긴 학교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한성사범 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 체조가 교과목으로 부과되었고 이를 통해 체조교 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교육된 체조는 병식체조였는 데, 이는 1881년 일본군의 육군 소위였던 호리모도를 교련관으로 삼아 양반 자제들을 교육한 것에서 처음 시작되어 1881년 이후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유학한 유학생들에 의해 활발하게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학교에서의 체 육 교과목은 대부분 수의과목이었을 뿐 필수과목이 아니어서 실제로 얼마나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교육이 충분 히 이루어지지못한 이유는 비록 일본의 도움 또는 군대의 도움을 받더라도 당시 체육을 가르칠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성사범학교에서 체조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시기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사범학교령」을 공 포하여 일본인 교관들을 배치하면서부터였다.
초기 학교에서 체조가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나 보급되었는가에는 다소 미심 쩍은 점이 없지 않지만 이 시기에 또 다른 체육활동으로 운동회가 활발하게 펼쳐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애초 관공립학교를 중심으로 시행되었던 운동회가1895년부터 비교적 정례적으로 열려 다수의 조선인이 참여하는 행사가 되었 기 때문이다. 최초의 운동회는 외부대신 김윤식이 주체가 되어 설립된 을미의 숙에서 1895년에 연 운동회로 알려져 있다. 그 운동회에서 정확히 어떤 종목 이 어떻게 치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을미의숙이 일본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학교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미 19세기 초반부터 운동회가 활성화되었던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때의 운동회에서 열렸 던 종목은 설비 부족으로 근대 스포츠의 전형적인 종목들과는 큰 관련이 없는 종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1896년에 영어학교 주최로 동소문 밖 삼 선평에서 열린 운동회의 경기종목은 300보 경주, 600보 경주, 1,350보 경주, 공던지기, 대포알 던지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의 육상종목과 이인삼각, 당나귀 달리기 경주 등의 유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근대 스포츠의 발상 지인 서구 사회에서조차 아직 각 종목의 규칙이 충분히 정비되어 있지 않을 때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형적인 근대 스포츠의 형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 고 우왁굳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운동회의 정례화는 근대 스포츠가 우리 사 회 구성원들의 일상에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새로이 생겨난 근대학교뿐 아니라 전통적 교육기관이었던 서당 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운동회가 개최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또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운동회를 연 이후 학교뿐 아니라 황성기독교청년회나 체육구락부 같은 단체가 주최한 운동회도 활발하게 열렸다. 한편 1897년에 영 어학교를 통해 체조 외의 근대적인 구기운동으로 축구경기가 열리는 등 근대 스포츠의 본격적인 소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선교사들이 세웠던 배재 학당과 이화학당 등의 사립학교에서도 근대 스포츠가 소개되었다. 이들 근대 스포츠는 정규 교과목이 아니라 과외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 최초로 근대 스포츠에 대한 경험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을사늑약 이후 사립학교에서의 체육과 통감부의 억압
한성사범학교를 비롯하여 관립학교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을사늑약 이전의 체육교육은 개인위생 의식을 함양하고 건강한 국민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추 고 있었다. 반면, 을사늑약을 통해 일제에 의해 실질적인 주권의 침탈이 이루 어진 후에는 선각자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싸울 주체 를 양성하기 위해 군사교육에 가까운 스포츠 교육이 이루어졌다. 특히 군대해 산을 계기로 설립된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등에는 구한국 군대 출신의 교관이 다수 체육교사로 부임하여 군사훈련과 유사한 체육교육을 부과했다. 이들에게 체조는 곧 전투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규정되었고, 체육교육은 강건한 신체와 민족의식을 갖춰 일본의 침탈에 대항할 국민을 양성하는 수단이었다. 이들 학 교에서 이루어진 체육교육에서도 병식체조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안창호가평양에 설립했던 대성학교에서는 체조시간을 매우 중시하여 예비과와 초등과 1, 2, 3학년 전 학생에게 병식체조를 가르쳤고 그 교육방식도 매우 혹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학교가 오로지 병식체조만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고 대성학 교에서는 야구와 축구 등의 근대 스포츠도 널리 장려했다. 한편 1906년에 민 영휘가 세운 광성의숙의 이름이 바뀐 휘문의숙 역시 각 학년에 체조를 정규과 목으로 부과했다. 또한 휘문의숙에서도 과외활동으로 야구가 이루어졌으며, 1907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의 지도하에 야구부가 창설되기도 했다.
하지만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 통감부의 강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면 서 사립학교의 체육활동은 점차 침체의 길을 걷게 된다. 통감부의 개입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1908년의 「사립학교령」과 1909년 마련된 학교체조 교수 요목을 꼽을 수 있다. 「사립학교령」은 1900년대 후반 들어 한국인이 설립하는 사립학교가 크게 늘어나자 이를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원래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도 대상이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이 설립한 학교에만 적 용되었다. 「사립학교령」에 따라 모든 사립학교는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 학부대신은 규정을 위반한 학교에 대한 폐교명령권까지 지니게 되었 다. 실제로 「사립학교령」의 공포 이후 이전까지 선각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던 수많은 사립학교의 대부분이 인가를 받지 못해 폐교처분되고 말았다.
한편 교수요목이란 학교교육에서 각 과목마다 반드시 가르쳐야 할 주된 내 용을 규정한 것으로 이 교수요목을 통해 통감부는 사립학교에서 이루어지던,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내용을 배제하고 일제의 필요에 맞는 내용을 강제할 수 있었다. 또 일제는 학교에서 실시한 병식체조와 군사훈련을 적극적으로 저지 했으며, 운동회는 개최 횟수를 제한하거나 아예 금지하고자 했다. 물론 이 같 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연합운동회는 계속 열렸으며, 심지어 일제 경찰 과 충돌하기까지 하는 등 체육을 통한 민족운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하지만 결 국 1912년이 되면 개별 학교 단위의 운동회를 제외한 연합운동회는 모두 폐지 되고 만다.
여성에 대한 체육교육의 시작
대한제국기의 체육활동에서 특기할 점은 여성도 체육교육의 대상이 되었다 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사회는 특히 양반 여성의 사회활동을 엄격히 규제 했으며, 그 결과 여성의 활동은 대부분 가정 내의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그런 데 대한제국기에 들어와 이처럼 제한되어 있던 여성의 활동 영역이 가정 바깥 으로 확대될 수 있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이른바 '모던 걸(moder girl)'이 등장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여성에 대한 체육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설 립된 여자학교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1886년에 설립된 이화학당에서 초기부터 체조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여성에 대한 체육교 육이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화학당에서 체조를 실시하자 곧 사회문제화되어 학부형들의 반발을 샀으며, 심지어 한성부에서 정식으로 체조 중단을 요 구하는 공문을 이화학당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탄압 속에서도 여성에 대한 체육교육은 꾸준히 확대되었고, 1908년에는 이화학당에서 메이데이 화류놀이라는 명칭의 운동회를 시작했다.
또한 1909년 창덕궁 비원에서 열린 한성여학교의 운동회에는 황제 내외의 참 관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여성에 대한 체육교육이 공 인된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기는 우리 체육과 스포츠의 형성기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 를 지니지만 또한 광복 이후 우리 스포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여성에 대한 체육교육이 시작되었던 때로도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 사회 의 경우 근대화를 향한 열망 속에서 다소의 저항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성에 대한 체육교육이 좀 더 쉽게 용인되었고, 이는 우리 체육계에서 여성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모던 걸(modern girl)
모던 걸은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신식교육을 받고 기존 여성의 규범에서 벗 어난 행동을 하는 여성을 말한다.
동아시아의 각 나라에서는 근대화 정책이 진행되면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이에 근대 여성상인 현모양처를 길러 내기 위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 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정부가 남녀 모두를 대 상으로 초등 • 중등 교육을 실시했고, 조선에서도 선교사들이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 성들을 교육했다. 청에서는 민간에서 여학당을 세우고 근대 교육제도가 확립되자 여성 교육이 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학교를 통해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서양 문물과 문명개화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여 성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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