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감정기와 독재정권시기의 교육과 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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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감정기와 독재기표적 사례이다. 

 

일제감정기의 일반적 이해



먼저 일제강점기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시기를 의미한다. 식민지란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적인 주권을 갖고 있지 않은 나라를 이른다.
15세기 유럽인들이 인도 항로 및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는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 하여 그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처럼 다른 민족과 국가의 영토를 침략하여 국가의 지배권을 확대시키는 정책 또는 행위를 제국주의라고 하는 데, 우리나라는 이런 제국주의의 막바지에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했던 후발 제 국주의 국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선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서구 국가들의 간섭을 우려하여 강제적인 점령의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0년에 이루 어진 한일합병이 당시 우리 정부 내각의 자발적인 결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만들었던 것이 이를 보여 준다. 물론 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 실제로 는 일제의 입김으로 임명된 친일 내각이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처럼 1910년의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역시 친일 내각의 협조에 의해 이루어진 1905년의 을 사 늑약(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 식민지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제4장에 서 보았듯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기구로 통감 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경찰력을 강화시키는 등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일제가 패망 한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흔히 일제강점기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먼저 첫 번째는 1910년부터 1919년에 이르는 무단통치기로 불리는 시기이다. 이때는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 를 박탈하는 등 철저한 강압으로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통제했던 시기가 다. 두 번째는 1920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이른바 문화통치기로 불리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의 3• 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저항의식을 누그러뜨리고자 신문의 발간을 허용하는 등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율적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때이다. 세 번째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의 시기로 1937년의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일제가 참전하면서 전쟁을 위한 국민총동원체제를 구축한 때이다. 이 시기 일 제는 우리 민족을 일본인의 일부로 만들려는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 또는 황민 화 정책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국민총동원정책에 편입시켰다. 학 도병과 위안부 등 전쟁을 위해 우리 국민의 희생을 당연시했던 일이 벌어졌던 것도 그때이다.
이처럼 시기에 따라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정책에는 다소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일제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를 착취하려는 목적이 깔 려 있었다. 심지어 외견상 우리나라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 여러 정책, 즉 근대적 교육과 행정 체계의 도입, 철도와 도로 등 경제 인프라의 건설, 산업화 등과 관련된 정책들도 궁극적으로는 일제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부 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쌀 생산을 늘리려고 1920년부터1934년까지 진행되었던 산미증식계획이라든지, 전쟁 물자의 원활한 조달을 위 해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산업의 발전이 아니라 군수물자 생산 중심의 중화학 공업화를 진행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이처럼 일제의 통치방식이 바뀜에 따라 우리 사회의 체육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제 이런 변화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근대적 학교제도의 완성



개항 이후 쇠락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 속에 서 진행되었던 교육개혁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지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근대적 학교제도가 완성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 였다.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일제는 근대적 학교제도를 정비했다. 그 결과 비 록 제한된 수이지만 상당수의 학령기 아동과 청소년이 학교에 취학했다. 소학 교에서 중등학교에 이르는 위계적 학교구조가 완비되었으며, 각급 학교에서 교육해야 할 내용에 대한 표준화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가 이식한 근대적 학교제도는 처음부터 다소의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에 이식된 틀이 원래의 모델이었던 일본의 교육기구에 비해 다소 못 미치도록 차별적으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이다. 먼저 일제는 우 리나라 국민을 유순한 신민, 초보적 기능인으로만 양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 리나라의 초중등학교의 교육연한을 일본에 비해 1~2년씩 짧게 설정했으며, 최고의 교육기구도 사회적 엘리트의 양성기구인 대학이 아니라 기능적 전문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로 제한했다.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긴 것은 1919년의 3.1 운동 이후에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펼쳐지자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을 만든 후부터였다. 경성제국대학을 만든 후에도 일제는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고 대학에서의 전공도 기능적인 부분만 개설했으며, 추가적인 대학의 설립도 막는 등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인재의 수를 계속 억제했 다. 즉, 일제는 이런 차별적 정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지도할 만한 능력을 갖춘 근대적 지식인이나 과학기술인의 성장을 가능한 막고자 했다.
차별적 교육을 보여 주는 두 번째 사례는 우리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을 위 해 별도의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한국인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던 일본인 학 교는 우리나라에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한국인 학교와 달리 일본의 학교와 동일한 수업연한과 교과과정을 운영했는데, 이는 일제가 처음부터 일 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차별을 의도했음을 보여 준다.

경성제국대학
1923년 이상재(추금조)를 대표로 하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 총회가 개최되어 거국적인 민립대학 설치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은 일제는 이를 저지하는 한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우리나라에 대학을 설립했다.
1924년에 먼저 초기 중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2년제 예과차)만으로 개교했다가, 1926년에 3년제 법문학부와 4년제 의학부를 설치하여 총장에는 조선총독 부 정무총감(파 초속 위원)이 취임했다.
당시 법문학부에는 법과 철학과 • 사학과 • 문과의 4개 학과가 있었으며, 1929년
4월에 최초로 법문학부 제1회 졸업생 90명(한국인 22명), 1930년에 의학부 졸업생
55명(한국인 12명)을 각각 배출했다. 일제가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먼저 설치한 것은 식민지 개발에 이익이 되는 실제적인 학과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이공학부를 두지 않은 것은 한국인에게 과학과 고등기술에 관한 이론적인 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려 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며, 그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위한 필요성이 생기자
1938년에는 이공학부를 신설하게 되었다.
학문연구에서도 연구분야가 제한되어 학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매년 모집정원에서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했다. 특히 이공학부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1934년 3월에는 종래 예과의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1941년에 이공학부의 정원을 증원했다.
광복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이라는 교명이 없어지고 대학 내의 한국인 직원들로 구성된 경성대학자치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 해 9월 10일에 법문학부. 이공학부 의 3학년과 의학부 4학년 졸업자에 대한 졸업식이 거행되었으며, 9월 19일에 대학의 행정사무가 미군정으로 이양되고 교명을 경성대학으로 개칭했다.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 18회, 의학부 17회, 이공학부의 3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배출했으며, 이들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은 모두 810여 명이었다. 그 뒤 1946 년 9월에 국립서울대학교가 발족되면서 서울대학교에 통합되었다.

#썸네일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지만 부산 구덕경기장에서 열린 야구대회 모습. 뒤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중절모를 쓴 관람객드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일제강점기 학교에서의 체육



전반적인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학교체육도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화를 겪었 다. 무단통치기의 학교체육에서는 일제의 목적에 부합하는 체조교육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일제에 대항할 전사의 양성을 목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대 한 제 국기의 체조교육과 달리 건강하고 유순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둔 교육이었다. 오동섭에 따르면, 일제는 1911년 교육칙령과 총독부령 등을 통 해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의 교육규칙을 제정했는데, 여기에서 공히 체조교 육의 목적은 "신체의 각부를 고르게 하여 자세를 단정히 하고 정신을 쾌활하 게 하며, 아울러 규율을 지키고 절제를 숭상하는 습관을 기름"으로 설정되어 있어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는 인물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 시기 학교체육에서 주로 교육되던 체조는 스웨덴식 체조였는데, 이 체조는 그 이전의 병식체조와 달리 건강에 중점을 둔 체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시의 체조가 국권상실 이전의 체조와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1920년 배재학교 학생들이 집단적 수업거부인 맹휴를 벌이며 내건 조건에서 한일합병 이전의 학교에서 성행했던 병식체조의 교수를 요구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국 우리 근대 스포츠의 발전을 이끌었던 두 경로, 즉 학교체육과 클럽 체육 중 학교체육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최소한의 형태만 유지된 채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문화통치기의 체육교육은 근대 스포츠의 본격적인 확산이라는 점에서 의미 가 있다. 제8장에서 살펴보게 되듯이 이 시기에는 여러 종목의 전국대회가 활발히 개최되었고 우리 학생들이 일본의 전국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 기 반이 되었던 것이 바로 학교체육이었다. 이는 일본의 체육대회가 클럽보다는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우리도 그 틀을 그대로 이식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기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제가 전시 총동원체제로 들어가기 시작한 때이다. 이런 총동원체제는 우리나라에도 적용되어 우리 역 시 전쟁의 주체로 만들기 위한 정책이 펼쳐지게 되었다. 황민화 정책과 같은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는 일본을 내지, 그 외의 식민지를 외지로 하여 차별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이 시기에 와서는 일본과 조선이 동일하다는 의미의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일본의 전쟁에 우리도 참여하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교육에서 황민화 정책은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의 개정 이후 1945년 일제의 패망 때까지 지속된 정책을 말한다. 또 1943년에는 제4차 조선교육령의 개 정이 이루어져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령'이 선포되었으며, 이를 통해 학교 교육은 완전히 전시교육체제로 바뀌었다. 최소한 중등학교 이상의 각 학교는 모두 전쟁수행의 도구로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지 안 는 것들은 배제되었다. 사립학교의 폐쇄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체육에서는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무사도 정신을 갖게 할 목적으로 만든 체조인 황국신민체조를 통해 학교체육의 군사훈련화를 도모했다. 또한 일반 청년에게는 전시체력관리라는 명목하에 체력장검정을 십 시 하기도 했다. 체력장검정에서는 남자의 경우 달리기, 높이뛰기, 던지기, 운 반, 매달리기, 여성은 달리기, 멀리뛰기, 수류탄 투척, 운반, 매달리기 등을 측 정하여 군사훈련과 유사한 훈련을 하도록 했다. 이런 체육의 재군사화는 형식 적으로만 보면 대한제국기의 체육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런 형식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개화기에 존재했던 정신은 완전히 상실되고 오직 일제의 도구로서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물론 일제가 아무런 명분 없이 체육의 군사화를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는 문화통치기의 근대 스포츠 중심 학교체육이 일부 선수 양성에 치우쳐 있어 학생 전체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전 학생이 참여하는 체육을 장 려해야 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전 학생이 참여하는 체육의 목적은 국방력의 함양으로 되어 있어 그 명분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해진다.

광복과 함께 달라진 것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이룬 후 우리 교육에는 상당한 변화가 찾아왔다. 1948년 헌법이 제정 • 공포되고, 1949년 12월 「교육법」이 공포되어 1950년부터 시작된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이라든지, 우리 국민들의 성장을 억압하기 위해 경성제국대학 한 곳만 제외하고 대학의 설립을 억제했던 일제의 억압에 서 벗어나 대학 설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또 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차별적 교육도 사라졌다. 국어와 국사 등 우리의 언어와 역사를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게 된 것도 광복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우리 교육과 체육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여 시행할 주체가 일제가 아닌 우리 정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광복 이후 우리 교육과 체육은 일제의 이익을 위한 수단 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나라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었 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다시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는 광복 이후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정권이 일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독재정권 역시 같은 민족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의 지배권력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권력이 일본 국민의 전체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과 마 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독재권력도 그 권력 자체의 유지를 위해 많은 국민을 수 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일제 권력과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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