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하지 않았던 스포츠 - 한국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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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하지 않았던 스포츠

 

빼앗긴 운동장, 빼앗긴 스포츠

 

아파트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주거 형태가 되기 이전 우리 사회의 도시에는 단층의 한옥이 백백이 들어차 있었고. 그 한옥들 사이로 미로 같은 골목길이 펼쳐져 있었다. 승용차도 거의 다니지 않던 시절 그 골목길은 개구쟁이 어린이들의 놀이 공간이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온 아이들은 그곳에서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했으며, 술래잡기와 사방치기, 비사치기, 제기차기 등 의 민속놀이를 즐겼다. 근처에서는 여학생들의 고 무출놀이가 진행되었으며, 짓궂은 남아들이 고무줄을 끊고 도망갈 때 골목길에는 새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부터 그곳에서는 축구와 비슷한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아이들 스스로는 축구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모습은 축구와 큰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길에는 골라인이나 사이드라인 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골대는 어디선가 주워 온 돌멩이나 등하굣길에 항상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고 당연히 골포스트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차고 다녔던 공은 축구장과 골목길의 비례와 걸맞게 축구공이라고 하 기애는 너무 작은, 야구공보다 더 작은 고무공이었다. 그 공을 차며 그들은 텔 레비전에서 보았던 차범근과 이회택의 동작을 흉내 내고 이세연을 머리에 떠 올리며 상대의 슛을 막았다. 어디 축구만 그랬을까? 축구공은 곧바로 야구공이 되기도 했지만 배트가 없다 보니 주먹 쥔 손이 배트를 대신했으며, 글로브는 신문지를 장갑 모양으로 집은 것이었다. 네 개의 베이스를 마련할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많은 경우 베이스는 근처의 전봇대 하나분이었다. 정식으로 야구 규칙을 배울 기회를 한 번 도 가진 적이 없던 아이들은 어설프게 얻어들은 규칙을 둘러싸고 수시로 말다 틈을 벌였고 때로는 토라져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나마 향내라 도 낼 수 있었던 야구와 달리 네트와 골대를 구할 수 없었던 배구와 농구는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시합의 종료시간은 저녁을 먹을 시간 또는 누군가의 집 담장 위로 공이 넘어가 더 이상 놀이의 도구가 없어질 때까지였다. 하교 앞 문방구에서 공책 한 권의 가격 정도로 살 수 있는 저렴한 고무공이었지만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그 공조차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아이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누군가 새 공을 가져올 때까지 아이들의 스포츠는 중지되어야 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사용하던 낡은 테니스공을 가져오기라도 한다면 아이들의 스포츠는 단번에 격 상되고 테니스공은 또래의 보물로 다루어졌다.
왜 아이들은 넓은 학교 운동장을 두고 동네에 와서 놀이를 했을까?

그 이유는 많은 학교에서 운동장이 소수 운동부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 다. 일과시간 중에 체육시간을 위해 활용되었던 운동장은 방과 후 시간과 함께 운동부의 전용 공간으로 바뀐다. 정식 공간에서 정식 장비를 활용해 정식 시합을 대비하는 운동부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운동부가 아닌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멀리 떨어져 별도의 공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운동부의 연습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빽빽한 도시에서 다른 공간을 찾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결국 부족하나마 동네 골목길로 만족했다. 그나마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고 긴 노동시간 때문에 어른들의 왕래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 위안거리였다. 적어도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러 오시기 전까지 골목길의 지배자는 아이들이었다. 실수로 공을 잘못 넘겨 어느 집의 유리창을 깨지 않는 한은 말이다.

많은 놀이에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즐겨 왔던 민속놀 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제기차기를 하려면 제기가, 팽이치기를 하려면 팽이와 채가, 고무줄놀이를 하려면 고무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근대 스포츠를 즐기려 할 때 필요한 도구는 이들 민속놀이의 도구와 차이가 있다. 민속놀 이의 도구는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거나 우리 스스로 만 들 수 있는 것들이다. 비석 치기를 하기 위해 운동구점에서 무언가를 사 올 필 요는 없다. 집 근처에 굴러다니는 기와 조각이나 뭉툭한 돌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스포츠의 도구는 자연적인 상태에서 구하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돼지의 오줌보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나 둥글게 뭉친 짚이 축구 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게 해 주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축구를 하려면 이를 위해 전문적으로 제작된 축구공이 있어야 한다. 그나마 나무 가동을 세보 골포스트와 크로스바를 만들 수 있어 다른 도구가 거의 필요 없는 축구조자 그렇다. 훨씬 더 많은 장비를 필요로 하는 야구나 아이스하키라면 더 말할 나 의가 없다.
그래서 민속놀이가 아닌 스포츠는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놀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던 스포츠(민속놀이)는 빼앗겨 버렸고 근대화된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우선 그에 필요한 시설과 장비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 다.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 정신적 여유를 따지는 것은 일단 시설과 장비 가 갖추어진 후의 일이다. 그래서 이런 시설과 장비가 보편화되기 이전 스포츠는 소수만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골목길에서 야구하는 아이들

 

팔방미인 엘리트, 학생

구한말 근대 스포츠가 우리 사회에 도입된 이래 YMCA 같은 극히 일부의 사회단체를 제외하면 근대 스포츠의 기반이 되었던 곳은 학교였다. 근래 스포 추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시설과 장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회 구성 원들의 소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니 개인 수준에서 시설과 장비를 갖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이 부족한 시설과 장비를 비록 공유를 통해서나마 향유할 수 있는 장소였고, 나아가 그때까지 생소했던 근대 스포츠의 규칙까지 교육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근대 스포츠의 중심이 학교이다 보니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은 소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함께 교육열도 함께 불타오르기 전가 지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처럼 학교교육의 보급이 부진했던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 구한말에 정부에서 세웠던 초기의 학교는 그 이전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분에 따라 학생의 입학에 차등을 두는 곳이었다. 이런 자별적 구조는 선표사 들이 설립한 학교와 국권수복을 추구하며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학교를 세웠던 애국지사들의 사럽학교가 많아지면서 곧 사라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적 학교체제가 정비되면서 광복 이후까지도 초등학교 교 유조차 학교교육은 무상이 아니었다. 그 결과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만 교육을 시킬 수 있었으며, 그런 여유가 되지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는 주로 장남을 집안의 대표선수로 삼아 교 육을 시키고 나머지 자녀들은 장남의 교육을 위해 희생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피임기구가 제대로 보급되기 전, 가족계획도 실시되기 전이다 보니 대부분의 집안에서 자녀의 수는 5~6명을 훌쩍 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영유아 사망률도 높았던 때이다 보니 자녀 수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런데 그중 장남만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학령기의 전체 아동들 중 교육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소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교육을 받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 버린 연령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그랬다.

둘째, 학교의 설립장소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교육 부문에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설립할 수 있는 학교의 수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 고, 결국 학교는 주로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에 설립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척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소규모의 부락을 이루며 전국에 분산되어 살고 있었다. 결국 학교가 설립된 상대적으로 인구가 밀집된 지역은 분산되어 살았던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접근성이 극히 떨어지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지금의 초등학교인 소학교가 기껏 몇 개 면당 한 학교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 그런 접근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 도시화가 충분히 진척되기 전까지는 교육을 받으려고 했던 농촌 사람들 중 다수가 중학교부터 도시로 유학을 가야 했던 것도 이런 접근성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교육비에 비해서도 더욱 높은 유학비용을 댈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은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근대적 교육제도가 정비되던 시기가 일제강접 기였다는 특수한 사정도 있다. 살펴본 바 있듯이 일제강점기의 교육정책이 전 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일제의 지배의도에 맞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적절히 훈육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무단통치기와 국민충동원기는 그런 일제의 욕구가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 떠났던 시기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제의 지배에 대해 저항의식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의 정책을 따르는 학교교육에도 일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우리 사회 전반의 취학률을 낮추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 제강점기 말까지도 전통적인 초등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이 광범위하게 잔존하 고 있었던 것은 이런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지닌 집안 출신이 다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엘리트로 취급받았으며, 나아가 그들이 교육받았던 학교가 근대 스포츠의 중심지였다는 점 덕분에 스포츠의 엘리트도 될 수 있었다. 즉, 대중교육이 본격화되기 전 우리 사회의 학생은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엘리트였고 스포츠는 그들의 엘리트성을 보여 주는 문화자본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모두가 스포츠를 즐겼던 것 은 아니다. 당시의 신문에는 스포츠 활동이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독점되고 있는 현상을 개탄하는 기사가 자주 보이는데, 이는 이 시기의 스포츠가 일제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부각되었고, 그 결과 일본인들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둘 가 능성이 있는 소수의 학생들에게 자원이 집중되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아직 근대 스포츠의 보급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서 비록 부분적이나마 그것을 접할 수 있었던 사람과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과의 차이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다 같이 하는 기마전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분석틀 속에서 계급이란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 라 규정되는 것이다. 즉, 공장의 설비나 원자재, 재정 등에 대한 소유와 통제력 여부로 정의되는 경제자본이 계급을 규정하는 일차적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 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요소들이 마 치 경제자본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취학 전 가정에서 습득하는 문화적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배계급 출신의 아 이들이 그렇지 않은 가정 출신의 아이들에 비해 문화적 능력을 습득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교육 과정에서 지배계급 가정 출신의 아이들에게 명시적으로 유리한 대우를 해 주지 않더라도, 이들 지배계급 가정 출신의 아이 들은 문화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한 아이에 비해 더 나은 성적을 얻게 되고 결과 적으로 더 좋은 학교에 취학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는 모든 어린이를 동일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지만 이 평가 기준 자체가 그 사회의 지배적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다 보니 지배계급 가정의 아이들은 더 나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 터 그는 경제자본과 더불어 문화자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가 이처럼 새롭게 자본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는 것 중에는 우리가 흔히 연줄망이라 부르는 사 회관계자본도 있다.

베이비붐과 과밀학교

 

소수를 위한 학교교육은 1950년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1960년대의 산업화와 함께 대중교육이 확산되며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아직까지 고던가요 육을 받는 사람들의 수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초등학교 교육은 누구나 이수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스포츠와 관련하여 문제는 대중교육의 확산 시기와 베이비붐 세대가 학령기에 진입한 시기가 겹친다는 점이었다.
베이비붐 세대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혼란을 겪었던 우리 사회는 학교 시설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교육에 투자할 충분한 재워도 지니지 못했던 우리 정부의 대책은 한편으로는 여러 특혜를 주어 사립학교의 설립을 장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된 하고 시설에 가능한 많은 주의 학생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저출산이 본 격화되어 학교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1990년대까지 우리 사회의 학교와 관련하여 늘 제기되었던 이른바 '콩나물 교실의 상황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다. 한 교실에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을 수용하고도 교실이 부족해 저학년에서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2부제 수업을 하는 학교가 다반사였다.

이를테면 1963년에는 2부제 수업을 실시하는 학급이 전국적으로 1만 5,000개였고 심지어 3부제 수업을 하는 학급도 800개가 있었다. 이런 현상은 상당 기 간 지속되어 1970년에도 2,672개교에 7,457개 학급이 2부제 수업을 실시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당연히 교육방식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개별 학생의 발달 과정이나 적성에 맞춰 교육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학생들의 사고력을 키우고 창의력을 함양하기 위해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든지 토론 을 하는 것도 현실 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개별 교사의 교육철학과 관계없이 우리 교육의 중요한 문제점으로 오랫동안 거론되었던 주입식 교육이 현실 적은 로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많은 수의 학생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학교생활에서의 규율이 절대적으로 강조되었다. 더구나 학생이 폭발 적은 로 늘어나던 시기가 독재정권의 시기와 겹침으로써 주입식 교육과 규율에 대 한 강조는 정권의 지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교육내용을 위주로 하는 다른 교과와 달리 몸의 움직임이 중요한 체 육과 스포츠는 주입식 교육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물론 체육교육의 극히 일 부분을 구성하는 이론 교육은 주입식으로도 교육할 수 있지만 몸의 움직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지식을 머리에만 주입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의 체육수업과 관련하여 이른바 '아나공 수업 (경상도 사투리로 '옛 다'를 의미하는 '아나'라는 말을 붙인 것으로 체육교사가 학생들에게 공을 던져 주고 학 생들 스스로 경기를 하도록 했던 수업을 가리킨다)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듯이 결국 이 시기의 체육시간은 대부분 일종의 놀이시간이 되었고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스포츠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받기보다 급우들과 어울려 제한된 지식을 공유하며 스스로 스포츠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베이비붐(baby boom)
어떤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아기를 가지고 싶게 하는 분위기로 인해 출생률이 급 격하게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구의 자연 증기율이 현저하게 높아진 는데, 대체로 전쟁이 끝난 후나 불경기가 끝난 후 사회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경우 종전 후인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 이 세대를 베이비부머라 한다. 일본의 경우 종전 후인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베이비붐을 이루었으며 이들을 단카이 세대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이 베이비붐 세대는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새로운 생활 문화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1960년대 말 베이비붐으로 인해 한 반에 50명정도의 아이들이 있다

스포츠보다는 입시와 취업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배경에는 그나마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 학교가 입시경쟁에 내몰려 스포츠 활동에 제대로 자원을 할애할 수 없었던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 적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당장 이들이 맞닥뜨린 것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입시의 허들이었다. 입시제도는 각급 학교별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다 가 1969년부터 중학교 입시는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고등학교 입시로는 1974년부터 연합고사라는 국가 공통의 시험만 치르고 학교별 시험은 폐지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역시 여러 제도의 시험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대학입학시험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우리 학교교육의 변화를 살펴본 바 있지만 대학입시제도도 수시로 바뀌었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도 입시 경쟁이 완화되지 는 않았으며, 오히려 바뀐 입시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사교육이 더욱 강조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결국 정규 체육시간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가운데 그나마 자율적인 스포츠 활동을 즐길 수 있었던 방과 후 시간까지 입시 준비에 매달리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특수목적고등학교와 자율형 사립고등학 교 등의 제도가 도입되어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입시가 강조되면서 대학입학을 위한 입시경쟁의 진입 연령이 점점 낮아지게 되었다.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대부분의 초등학생이 학원을 다니고 있어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친구조차 사 귈 수 없다는 한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 준비가 학교교육의 주를 이루게 되고 여기 에 1994년부터 체력장 제도가 폐지되면서 체육의 위상은 더욱 쪼그라들게 되었다. 국영수를 비롯한 입시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면 자율적인 독서 활동조차 노는 것으로 치부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령기의 아이들에게 스포츠는 저의 허용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아무리 교육적 목적을 지니고 있더라도 겉으로만 보면 신체활동과 노는 것이 전혀 구별되지 않기 때 문이다. 또는 노는 것에 포함되어 있는 교육적 의미를 우리 사회가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스포츠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이른바 박찬호 키드'니 '박세리 키드'와 같이 스포츠 선수를 미래 직업으로 꿈꾸는 학생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스포츠 영역의 낮은 성공 가능성 때문에 그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1996년에 대학설립준칙주의가 시행되어 대학의 수가 늘어나고 1997년 IMF 환란 이후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대 학이 취업준비 기간으로 바뀌면서, 입시경쟁에서 해방된 대학생조차 취업경쟁이라는 새로운 경쟁에 내몰려 스포츠 활동에 거의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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