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관람 여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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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관람 여가가 되다

 

그들은 왜 스포츠를 보았을까?


2020년 봄 코로나19의 창궐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던 시기 우리가 알고 있던 대부분의 일상은 중지되었다. 미세먼지가 없는 맑은 날에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썼고, 여러 사람이 모이는 행사는 중지되었으며,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를 곁들이던 사람들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자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갔다.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던 서울의 명동 거리와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로 늘 붐비던 인천공항에는 적막감마저 감돌았고, 혼기에 달한 남녀는 하객을 초대할 수 없어 결혼식을 연기하기도 했다. 일정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특수효과로 만든 영화의 흑백 정지화면처럼 일시 정지의 상태로 들어갔다.

스포츠 분야도 코로나의 영향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한동안 무관중 경기로 진행되던 프로농구와 프로배구의 포스트 시즌이 결국 취소되었으며, 프로야구는 개막 일정을 늦추다가 뒤늦게 무관중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텅 빈 관중석에 는 관중의 모습을 본 딴 인형들이 자리를 잡았고 팬들은 그저 텔레비전 중계 를 보며 스포츠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그나마 경기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나 라가 세계적인 코로나 방역 모범국인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때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야구의 종주국 미국의 시청자들이 우 리 프로야구를 시청하며 심지어 특정 팀의 팬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우 리 야구의 수준은 그리 낮지 않다. 대표팀끼리의 경쟁에서는 프로 선수들까지 참여하는 세계야구대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했고, 국가 대항전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나라가 아닌가? 박찬호와 추신수, 류현진 등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최상급 선수로 평가받았던 선수도 적지 않다.

하지만 최상급의 소수 선수를 제외하고 프로야구 전반의 평균적인 기량을 다 지면 한국의 프로야구는 미국 프로야구의 마이너 리그 증간 수준에 머무른다 고 평가받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프로야구에 메이저 리그에 열광하던 미국의 시청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 프로 야구가 뒤늦게 단축 시즌을 시작하면서 그런 관심은 곧 사그라들었지만, 미국 의 텔레비전에서 우리 프로야구가 중계되고 나아가 많은 시청자의 관심을 끈 것은 개별 선수의 메이저 리그 진출에 비견될 만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시청자들은 왜 수준 낮은' 우리 프로야구에 그토록 큰 관심을 보였을까?
그것은 스포츠를 관람하는 것이 많은 현대인의 중요한 여가활동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여타의 여가활동이 용이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스포츠 관람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회에 서 이제 스포츠 관람은 다소 불만족스러운 대체 상품이라도 구입해야 할 만큼 생활의 '필수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스포츠 관람이 필수재가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 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구경만 하는 것은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때 관람이라는 것이 단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는 말에서처럼 우연적으로 마주치는 체육활동의 관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람 스포츠가 성립되려면 그 나름의 제도적 기반 역시 구축되어야 한다.
서구의 근대 체육사에서 관람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대략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들어와 관람료를 받고 스포츠 경기를 벌이는 프로 스포츠가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프로 스포츠가 발 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면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미시적인 면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개별 자본가들의 활동이 필요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 공 장• 교구의 대표팀이 승리하는 것을 보기 위해 일정한 돈을 지불하려는 사람들 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이루었을 때 자본가들은 이 이윤의 기회를 활용하려고 프로 스포츠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관람 스포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한 스포츠 관람을 보는 관중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발전은 상대적으로 지체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을지적할 수 있다. 먼저 우리 사회의 뒤늦은 산업화의 결과 관람 스포츠의 주립객이 되어야 할 노동자들의 발전이 뒤늦게 이루어졌다. 제1장에서 살피면 있듯이 1960년대까지도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던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수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경제개발계획의 시행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한참 후인 1970년대의 일이다. 다음으로 노동자의 수가 많아졌다 라도 이들이 스포츠를 관람할 시간적 • 경제적 여유를 갖추지 못하면 역시 관 랍 스포츠의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1970년에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의 사례와 1980년대 말까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치열한 투쟁을 벌였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보여 주듯 1980년대까 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여가를 즐길 여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엄밀 한 의미에서 관람 스포츠의 기반이 성숙될 만큼 노동자들의 시간적 •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생긴 것은 1980년대 말 이후의 길이었다. 실제로는 2004년 주 40시간 노동제가 실시된 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세계적인 장 시간 노동 국가의 오명을 씻어 버리지 못하고 있듯이 그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

코로나 19로 인한 무관중 경기



텔레비전에 스포츠 경기가 나오다



근데 스포츠의 초창기부터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 관람은 일상적인 일이었 다. 천정환의 정리에 따르면, 당장 천여 명에서 수천여 명에 이르는 관람객들 이 개화기에 활발하게 열렸던 운동회를 함께 즐겼고,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에는 조선신문사의 주최로 일본의 와세다 대학 야구팀이 서울에 와 당시 조선 에와 있던 일본인들로 구성된 팀과 경기를 치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관 람료를 받은 최초의 경기였다. 나아가 1922년에 미국의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의 서해안 지방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동양만유(419.28%) 팀이 내한하여 전조 선 대표팀과 벌인 경기는 동양만유팀에 지불한 상당한 개런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광복 이후 1960~1970년대에는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 고교야구, 국가대표팀 축구경기 등이 대표적인 관람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비정기적이었을 뿐 아니라 일회적이었던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에 비해 4개의 주요 전국대회가 매년 같은 시기에 며칠간 연속해서 열리는 고교야구와 대통령 배 국제 축구대회는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 정규 시즌에 비견될 만큼 정기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관람은 여전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이 는 관람의 기반이 되는 우리 사회 시민들의 시간적 • 경제적 여유와도 연관이 있었지만 또한 우리 사회의 특수성으로서 이른바 서울중심성도 무시할 수 없 다.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의 주요 시합이 모두 서울의 장충체육관에서 열리 고, 고교야구의 주요 전국대회와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도 지금은 없어진 서울의 동대문 경기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학교팀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단체로 서울에 올라왔던 일부 학생을 제외하면 서울에 거주하 지 않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직접 관람의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다. 그들에 게 허용되었던 것은 기껏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한 간접 관람이 전부였다. 특히 위성 중계 시스템이 충분히 자리 잡히지 않았던 1970년대 중반까지 국제경 기를 접할 수 있는 통로로는 라디오가 유일했다. 라디오를 이용한 중계는 이미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때도 이루어진 바 있지만, 그때는 라디오 방송 시간이 하루 중 일정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기 중간에 중계가 중단되고 나중에 다시 방송이 재개되었을 때 결과를 요약해 주는 방식으로 중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1960년대가 지나면서 각종 스포츠 경기 의 실황 중계가 라디오의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리 는 킹스컵 축구대회와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메르데카 배 축구대회는 1970년대 초반까지 라디오 중계의 단골 메뉴였다. 여기에 신동 파와 김영기, 박한, 유희형 등이 활약한 아시아 농구대회와 남우식과 임신근, 황규봉 등이 활약한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에서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권투의 홍수환 등의 중계가 특별 메뉴로 곁들여졌다. 실 시간으로 전달되는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민들은 상상 속에서 경기 현장을 즐겼다.
1970년 대가 지나며 텔레비전이 급속하게 라디오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 다. 우리 텔레비전이 중계방송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그해에 국립극장 개관식이 최초로 텔레비전의 전파를 타고 중계된 것이다. 급조된 중 계차를 이용해 겨우 한 대의 카메라로 찍은 어설픈 중계였지만 텔레비전 중계 방송은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씨름과 야구 경기 대 회가 처음 텔레비전의 전파를 탔으며, 1963년 장충체육관이 개관하면서 프로 레슬링과 권투가 중계되는 등 스포츠 경기의 중계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의 보급이 워낙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스포츠 경기 중계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여전히 라디오였다. 그 러다가 197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급격하게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전자산업을 중점산업으로 선정하고 텔레비전전 생산에 박차를 가함과 아울러,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의 전달 목적으로 텔레비 전의 물품세를 면제해 주고 일명 '새마을 TV'라고 불린 저가형 텔레비전을 싸 게 공급함으로써 텔레비전의 보급이 급속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그 결과 1975년이 되면서 전국의 텔레비전 보급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서게 되며 1970년대 말에는 실질적으로 1 가구 ITV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 우리 국민 모 두가 일상적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에 힘입어 스포 츠 중계의 중심 역시 급속하게 텔레비전으로 이동했다.

텔레비전의 시대가 개막된 후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텔레비전으로 중계되 는 스포츠 경기는 그 이전 라디오 시대와 거의 비슷했다. 프로레슬링과 프로권투, 고교야구, 대통령 배 축구대회, 씨름 등이 텔레비전의 단골 메뉴였던 것이 다. 이따금 세계 프로테니스 대회의 중계가 이루어지기도 했고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경기의 녹화 중계가 정기적으로 방영되기도 했지만 주요 메뉴는 마찬가지였다. 1976년부터 이미 컬러 방송을 시작한 국내 주둔 미군을 위한 방송 AFKN에서 미국 스포츠에 대한 중계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영어 공부를 위해 AFKN을 시청했던 사람들이나 일부 마니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 민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텔레비전을 통한 스포츠 중계 시청이 우리 사회의 일상적 여가활동으로 바 뀐 것은 1982년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구기종목 프로 스포츠의 시대가 개막되 고 텔레비전이 그 경기의 중계자가 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프로 스포츠는 두 가지 점에서 이전의 스포츠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째, 프로 스포츠는 일상성을 지니고 있다. 개막 첫해 우리 프로야구는 6개 팀이 봄부터 가을까지 전기와 후기로 나눠 각각 40경기씩 팀당 총 80경기를 치르고, 그 후 전 • 후기 시리즈에서 각각우승한 두 팀이 포스트 시즌인 한국 시리즈를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특수한 사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주중 일정한 날에 정기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경기 가 열렸으며 이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프로야구의 팀당 경기 수는 개막 이듬해인 1983년부터 100경기, 1985년 110경기, 1989년 120경기, 1991년 126 경기, 1999년 132경기, 2000년 133경기를 거쳐 2015년부터 10개 팀이 팀당 114경기를 치러 한 해 동안 모두 720경기가 열리는 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1970년대에 관람 스포츠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그 이전의 고교야구도 봄의 대통령기와 청룡기, 여름의 봉황대기, 가을의 황금사자기가 매년 일정한 시기에 열리며 전체적으로 보아 일종의 시즌을 이루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 역 예선이 없이 전국의 모든 고고야구팀에 참가 기회를 주었던 봉황대기를 제 외하면 지역 예선을 치르는 예선 결과에 따라 대회마다 참가림에 다소의 차이 가 있었고, 대회와 대회 사이의 상당 기간 동안 불가피하게 휴지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휴지기는 다음 대회를 위한 지역 예선이 벌어지는 시기였지만 지역 예선전이 텔레비전의 중계 대상이 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사실 여기에는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던 상황도 영향을 미 쳤다. 1970년대까지 텔레비전은 주로 저녁시간대에만 볼 수 있는 매체였다.
1967년에 아침방송(6시 30분부터 9시까지)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전력 사정 문 제로 중단되었고, 1969~1970년 사이에 아침 6시에서 오후 1시까지의 방송이 있었지만 1973년의 석유파동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81년에 다 시 아침방송이 재개되기 전까지는 주중 텔레비전의 방영 시작 시간이 오후 5시 반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낮시간에 주로 벌어졌던 대부분의 스 포츠는 텔레비전 중계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고, 프로 스포츠의 등장 이후 야 간경기가 일반화되면서야 비로소 텔레비전 중계가 일상화될 수 있었다. 텔레 비전 중계의 단골 메뉴 중 하나였던 고교야구의 전국대회조차 대부분의 경기는 낮시간에 진행되었으며, 준결승과 결승 같은 일부 경기만 야간경기로 진행되어 텔레비전 중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결국 프로 스포츠 이전까지 가장 정례적으로 벌어졌던 고교야구도 참가팀이 나 휴지기의 길이 면에서 일상성을 이루기에는 다소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고교야구 대회 경기일이 서울에 살고 있는 특정 고교나 특정 지 역 출신 사람들의 동창회 또는 향우회 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교야구가 지 녔던 이런 비일상성과 일정 부분 연관되어 있다. 이에 반해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 사이의 휴가기간을 제외하면 시즌 내내 안정적으로 경기를 치렀던 프 로야구는 훨씬 더 일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프로 스포츠는 서울중심성을 탈피하여 서울 이외 지역의 사람들에게또 스포츠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프로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홈 앤 어웨이(home and avay) 경기, 즉 특정 팀과 나의 읍구장에서 한 경기들 하고 상대팀의 읍구장에서 또 한 경기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잡는다. 그전과 프로 스포츠 시대의 개막과 함께 진정한 의미에서 지역 스포츠의 시대가 열리 게 되었다. 물론 고교야구의 인기를 등에 업고 프로야구의 시대 이전에도
1974년부터 부산에서 개최된 화랑대기와 같은 지역대회가 없지는 않았다. 화 향매기는 대한야구협회와 부산일보사가 1949년부터 공동주최했던 성품과 한 회가 전신으로 청룡기, 황금사자기와 더불어 초창기의 대표적인 고교야구 대 회였으나, 고교야구의 인기가 높아지기 전까지는 사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 위상이 그리 크지 않았던 대회였다. 그러다가 고교야구가 1970년대의 대표 스포츠로 상승하면서 명칭을 바꿔 대회를 개최하며 상당한 인기를 모았지만 아무래도 서울에서 개최되는 대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던 것 이 사실이다. 이는 1979년부터 대한야구협회와 매일신문사 주최로 대구에서 열렸던 대봉기 야구대회도 마찬가지이다. 2011년 고교야구 주말 리그가 출범하면서 고교야구 대회로는 대통령기와 청룡기, 황금사자기만 남게 되었는데, 이는 각각중앙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경기로 우리 스 포츠의 서울중심성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프로 스포츠 시대의 개막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도 전국으로 중 계되는 중요한 경기가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스포츠의 서울중심성을 완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이전까지 스포츠 경기의 직접 관람 기회를 제한받아 왔던 여러 지역의 사람들에게 직접 관람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결과도 가져왔다. 단순 수치로 보면 여전히 텔레비전을 통한 간접 관람객의 비중이 압도적이지만 전국의 주요 지역을 망라하는 직접 관람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첫 야구 중계 3루석 자리



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AFKN, AFN Korea)
미군방송본부(Armed Forces Radio and Television Service: AFRTS) 체제에 소속 되어 있는 해외주둔 미군방송국의 하나이다. 미군방송은 전 세계에 걸쳐 26개국과
8개 미국 내 지역을 포함해 총 400여 개에 이르는 라디오 •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AFKN은 주한미군을 위한 선무(금) 방송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국의 매스미디어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AFKN의 주요 방송목적은 첫째, 미국 정부의 가치와 국가적 유산 및 전통을 이해 시키고, 둘째, 자유주의 제도에 저해가 되는 이데올로기를 알리고 절대적으로 지켜 야 할 자유의 가치를 이해시키며, 셋째, 공산주의의 위협을 충분히 인식시키고, 넷째, 군인 개개인의 책임과 목적을 뚜렷이 인식시킨다는 것 등이다.
6 • 25 전쟁 중 국제연합(UN)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의 반도호텔에서 라디 오 이동방송국으로서 출발한 것이 이 방송의 시초였으며, 이동방송차를 이용하여 한국에 파병된 미군 및 UN군 장병에게 전파심리전의 일환으로 오락을 통해 위안과 용기를 줌으로써 전의를 고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계속해서 한국에 주둔하게 되자 AFKN 라디오 중앙방송국도 정규방송 국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1954년 방송국을 반도호텔에서 미 8군 영 내로 옮겼다. 1957년 9월 15일 주한미군방송국은 VHF 공중파 채널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여 한국 텔레비전 문화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83년 10월 4일부터 해외주둔지로는 처음으로 도입한 SATNET라는 위성방송 시스템을 통해 미국 본토와 24시간 내내 언제라도 위성을 통한 직접 방송이 가능해 졌다. 이에 따라 미국의 주요 프로그램이 한국의 안방에 그대로 방영됨으로써 한국 은 물론 한국의 방송정책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한미군방송의 법적 근거는 1966년 '주한미군지위협정' 제3조 2항(나)인데, 이 규정에 의해 주한미군방송은 한국 정부의 아무런 법적 통제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방송활동을 해 오고 있다. 주한미군방송의 프로그램은 대부분 AFRTS에서 제공해 주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드라마에서 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구성된다.
한국의 초기 라디오 방송은 국영인 KBS 라디오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도 방송의 공정성과 정확성, 다양한 오락방송의 결여로 학생이나 지식층로부터 사 랑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주한미군방송은 중요한 대안적 매체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방송은 한국의 방송 상황에 미국적 상업방송 프로그램의 씨 앗을 뿌렸으며, 한국의 대중문화를 미국의 저질 대중문화에 물들게 한 중요한 문화 전파 기구였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즉. AFKN은 미국의 상업문화를 한국에 전 달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1996년 4월 30일 주 한미군방송은 수신 범위나 지역을 제한할 목적으로 수신방송체제를 VHF 채널 2번 에서 UHF 채널 34번으로 전환했다.

주한미군방송 편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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